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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주 Jul 03. 2024

할아버지의 유산


한적한 외곽 도로는 찬찬히 운전하는 맛이 좋다. 복잡한 도심 속 옹졸한 운전과 달리, 교외 도로는 시냇물 떠가는 나뭇잎처럼 도로 따라 유유히 흘러갈 수 있어 좋다. 오가는 차들이 없으면 마음속 여유가 난다.


지난가을 어는 햇살 좋은 날 드라이브 삼아 차를 몰고 나왔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한가로이 운전하는데, 한참 뒤에 보이던 차가 경주하듯 쌩하고 와서 내 뒤를 따라붙더니, 거칠게 옆차선으로 돌아 꽝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앞서간다. 이럴 때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 그렇게 바쁘면 어제 나오지 그랬냐?


우리 집안에서 속담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 말은 할아버지의 유산이다. 예나 지금이나 있는 성질 급한 운전자를 향해 날린 할아버지의 일침이셨다고, 아버지를 통해 들었다. 거친 욕지거리나 비난이 아닌 해학으로 받아낸 할아버지의 말씀이 기발하고 재밌어서, 지금도 거친 운전자들을 보면 속으로 되뇐다. 그러면 왠지 불편한 마음이 싹트기 전에 유쾌함으로 덮어버린 느낌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우리 집안은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단다. 일제시절 경상북도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지내셨던 할아버지의 가족은 징글징글한 가난에서 벗어나려 온 식구가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젊은 시절 청년 할아버지는 큰돈을 벌겠다며 몇 년씩 만주를 다녀오셨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일본으로 징용을 가셔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일본의 채석장에서 노역을 하시다가 다리를 크게 다치셨다. 가장의 빈자리를 물려받은 첫째 아들마저도 큰돈 벌어오겠다며 어린 나이에 집을 나셨고, 한참을 돌아오지 못했다. 그나마 손재주가 좋으셨던 할머니가 온 동네 바느질거리를 받아다 삯바느질한 돈으로 먹고 사셨단다.


다행히 가난이 나에게 대물림되지 않았다. 지금 나의 가난은 오로지 나의 게으름과 욕심 없는 내 천성에 기인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시골이긴 하지만 나름 건물주로 은퇴하셨고, 만족스러운 노후를 즐기시고 계신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 가지 남은 아쉬움은 할아버지의 유쾌한 해학 유전자가 모조리 작은 아버지께로 전해진 일이다. 온 식구가 모이는 자리라면 언제나 작은 아버지의 농담에 온 가족이 웃음바다가 된다. 얼마 전 가족 모임에서도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만주로 독립운동을 가셨다고 농담을 하셨고, 일본 징용도 사실은 천황 암살을 도모했다며 너스레는 늘어놓으셨다. 그 덕에 온 가족이 웃음을 나누었다.


열렬히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우리 세대에 정말 필요한 능력이 유머지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부아 나는 일에 맞서는 뜨거운 분노보다 풍자와 해학으로 넘어서는 넉넉한 마음이 못내 부럽다. 내게 남은 속담 같은 할아버지 농담으로 섭섭함을 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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