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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logic Sep 12. 2022

개선 글꼴, 진화 글꼴, 파생 글꼴 그리고 표절 글꼴

소프트웨어의 경우


30여 년 전에 만들어 두었던 컴퓨터 코드의 일부를 다시 사용해 본 적이 있다. 

당시에 "C"라는 언어로 만들어진 코드는 지금 내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C++"또는 "C#"이라고 하는 언어와 유사하여 일부를 가져다 쓸 수 있는 상황이다. 필요에 따라 이곳저곳을 수선하여 사용하다 보니, 당시에 만들었던 많은 오류를 발견하게 되었고, 해당 코드로 완료된 당시의 프로그램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다.


이 프로그램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면 한번 업그레이드 판을 만들어서 발표해야 하겠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은 그 프로그램이 동작하는 운영체계(operating system)에 따라 사멸하는 경우가 많아서 업그레이드 판을 만들 필요는 없어 보인다.

스스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개선하여 새로운 버전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라고 한다.


때로는 남들이 만들어 판매하는 프로그램의 기능을 보다 개선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 프로그램과 경쟁하는 프로그램이 나타나기도 한다.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는 비슷할 수 있지만 그 프로그램을 구동하기 위하여 작성하여야 하는 코드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정상적인 경쟁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수많은 워드프로세서가 세상에 존재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복제하였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기능이 개선된 진화한 프로그램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남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그냥 자신의 컴퓨터에 복사하여 쓰는 행위를 불법복제라고 한다.

불법복제라는 행위가 정당화 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생산한 2차 저작물을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글꼴의 경우


글꼴을 만들어 발표한 이후, 디자인의 오류나 글자 코드의 오류 등으로 인하여 글꼴을 업그레이드한 경우가 적지 않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정폭 넓이의 한글 글꼴만 받아들이는 신문 조판 프로그램이 가변 넓이의 글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면, 그에 걸맞게 글꼴을 수정하여 새롭게 공급할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개선 글꼴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사람이 만든 글꼴을 기반으로 조형을 개선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원 저작자의 허락이 있으면 좋겠지만(원칙상 말이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도 있다.


"모나리자" 원본의 미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원본 그림의 입에 덧칠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나리자의 입 모양을 바꾼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아무도 그 그림이 다빈치가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알이다. 이런 경우 패러디라고 할까?


엄밀히 말하자면 글꼴 업계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과거의 글꼴 모양을 가지고 파생 글꼴을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래의 셰리프 계열 영문 샘플을 보자.

미세하게 다른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글자가 어떤 폰트인지 구분할 수 있으신가? 당연한 이야기 이겠지만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진 다른 폰트의 글자들이다.


한글 명조 계열 샘플도 보자.

위의 명조체 계열 글자들을 보고 어떤 글자가 어떤 폰트인지 구분할 수 있으신가? 이 역시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진 다른 한글 폰트의 글자들이다. 여러분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글자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자세로 들여다보지 않는 한 각 글꼴의 폰트 명을 알아내기는 정말 어렵다. 글꼴 형태가 전체 느낌 상 명조 계열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터넷 지식인 사이트에 "이 글꼴 이름을 알려주세요"라고 하루에도 수십 개의 질문이 올라오지만, 명조나 고딕 계열의 글자를 보고 답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 글꼴의 개발자 정도가 아닐까?


특히 모든 업체에서 만들어 내고 있는 명조, 고딕 계열 글꼴들은 모두 최정호 선생이나 그 이전의 글꼴 개발자들에게 빚을 지며 글꼴을 만들고 있다 할 수 있다. 명조 고딕 형태의 글꼴에 관하여서는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해당 글꼴의 기본 형태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글꼴 디자이너 들은 이를 두고 과거의 글꼴이 가진 조형을 개선한 진화 글꼴이라고 합리화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다른 이들의 디자인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지만, 이러한 디자인적인 특성이 법적 보호가 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구나 만드는 명조, 고딕 이외의 글꼴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할까?


표절 글꼴


최근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유명 작곡가가 다른 사람의 곡을 표절했다고 하여 더 이상 방송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음악 표절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래와 같은 판례가 있다고 한다.

① 해당 음악에 「저작권법」상 보호되는 창작적인 부분이 존재하고,
② 그 부분을 이용자가 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용했으며,
③ 이용한 부분이 실질적으로 유사해야 합니다.
실질적 유사성에 대한 판단은 주로 멜로디 부분이 집중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화음과 리듬 및 음악의 형식까지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며, 몇 마디 이상이 동일한가의 양적인 부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2.2.10. 선고 2011가합70768 판결; 서울고등법원 2010.10.13. 선고. 2010나35260; 수원지방법원 2006.10.20. 선고 2006가합8583 판결서울고등법원 2008.9.23. 선고 2007나70720 판결) - <법제처 사이트 - 찾기 쉬운 생활 법령 정보 사이트에서 가져옴.>


디지털 데이터를 복제하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이다. 

앞서 말한 소프트웨어의 복제와 같은 형태의 불법 복제가 적지 않지만 사용자들의 인식이 점차 개선되어 이제는 상업적으로 글꼴을 사용할 시에는 관련 라이선스를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 되었다.


사용자가 하나의 음악을 다운로드하여 함께 듣는 수준이 아니라 다른 작곡가가 그 음악을 표절하여 자신이 작곡한 것처럼 발표하는 경우가 문제인 것처럼, 글꼴 사용자가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글꼴 사업자가 표절 글꼴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만든 것처럼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글꼴 업계에서 기존 조형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복제한 듯이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가 다 반사이다. 이를 복제라고 하여야 할지 표절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앞 선 글 어디에선가 이야기했지만 내가 만든 글꼴과 흡사한 글꼴을 만들어 판매하는 업체의 대표는 우리 글꼴이 "너무 예뻐서 자기 회사 디자이너가 그 글꼴을 토대로 새로 만들었다."라고 이야기하며 자신들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했다. 요즈음 정치인들의 수사를 그대로 닮아 있지만, 법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다만 동업자 정신에 호소할 뿐...



정리해 보자면...


글꼴을 만들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의하는 선에서 어느 글꼴이 개선, 파생, 진화 또는 표절 글꼴인지를 결정할 방법은 없다. 상식과 상도의가 통하고, 동업자 정신을 가진 이들이 함께하는 비즈니스 환경이 만들어 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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