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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PD Mar 15. 2020

유학 실패, 그 후의 일상

하지만 나는 실패를 토대로 더 강해지는 인간이었기에



(이전 편에 이어)


이번 편에서부터 드디어 내 실제 일기장을 공개하는 차례다. 거의 매일 일기를 쓰다보니 예전 일기량이 너무 많아서 평소에는 잘 읽지 않는다. 힘들 때는 제일 먼저 손이 가는 게 예전 일기장이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정말 오랜만에 약 2년 전의 일기를 다시 보게 되었다.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별 것도 아니지만 21살 저 나이에는 그 목표만이 전부였을 텐데, 전부였던 그것이 실행조차 못 하게 되게 된 순간 느꼈던 그 절망의 절절함. 앞으로는 어찌 살아야 하는지의 그 막연함은 아직도 느껴진다. 더 어리고 약했던 나였기에, 그것을 넘어설 수 있었던 내 자신에게 참 고맙기도 했다. 저 때의 나 덕분에 지금의 나도 존재하기에.



2018년 12월 15일의 일기
오늘은 드디어 용기를 내어 유학을 말씀 드린 날.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나를 옭아맸다. 오늘 밤, 나는 유학의 가능 여부보다 내가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몇 개나 박은걸까 생각했다. 못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가장으로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으셨고 오늘이 내내 생각나실까.
 
 버스 안에서 피곤을 무릅쓰고PT를 제작하고,  생전 처음 부모님과 카페를 가는 그 과정이 너무 어색했다. PT를 하는데, 내가 노력해온 이 고정을 부모님 앞에서 결과 보고 한다는 게 왠지 벅차서 눈물이 났다. 그 간 고생했던 내가 생각나서. 

 나의 발표를 들은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일어섰고, 집에 가는 차 안에서도 아무 말이 없으셨다. 이런 류의 침묵은 처음이지만,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결과도 보여.

 방학에는 집에 있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안산도 싫어. 하지만 여기 있으면 또 나를 감싸는 무력감에 아무것도 안 할 것만 같고 또 한 번 무력함에 얽매이는 게 싫어.생각이 많은 하루다. 이 새롭게 느낀 감정들이 네 성장에 큰 도움을 주길. 그러기라도 해야 되니까.


나의 부모님은 장난기가 많으시다. 진지한 순간을 본 적이 잘 없다. 하지만 이 날 나의 유학 설득 pt가 끝난 후, 처음으로 부모님의 진지한 표정을 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만 가자고 하셨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직감했다. 나 유학 못 간다.


 그 날 밤은 부모님이 변진섭 콘서트를 가기로 했던 날이었다. 난 변진섭의 노래 마저 망쳤다.





2018년 12월 16일의 일기
원래 이럴 줄 알고 있었지만, 역시 직접 겪는 것은 다르다. "현실적인 꿈을 꿔라" 라고 말씀 하시면서도 계속"물론 보내고 싶지만... 못 보내는 게. 이렇게 말 하는 게 미안하지만..."을 계속 덧 붙이시던 아버지. 거기서 흘린 눈물은, 유학을 못 간다는 좌절,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는 막막함...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뭔가 미래가 더 잘 보인다. 더 잘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냥. 어린 생각으로는, 내가 유학 간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 우리집의 현실을 직시한 것. 이런 대안을 내세운 나에 대한 자괴감, 크게는 미안함. 이런 말을 하는 애초의 나. 애초부터 내가 잘 해왔으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텐데. 욕심도 많으면서 무턱대고 예대에 진학한 지난 날들이 후회되고.
 
 왜, 그러니까 왜. 못해서. 이런 말을 부모님이 듣게 해서.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나. 아버지의 미안해하는 얼굴이 자꾸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데. 또 괜히 내 방으로 들어오셔서 "네가 설득력이 없던 게 아니었다. 네PT 좋았다. 다만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거야."라고 말하셨다.

 아니야. 다 내가 모자른 사람이라 그런거야. 욕심만 많고 만족할 줄 모르면서 또 그 만큼 잘 하지도 못해서 그랬어. 오늘의 감정을 잊지 말자. 오늘을 토대로 또 한 걸음 나아가는 거야.


전 날 밤 부터 그 다음 날 까지 나는 계속 무기력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유학은 못 간다'는 직접적인 통보는 듣지 못 했어도, 거의 마음 속으로 확정을 내고 곧 들을 결과를 덤덤하게 받아 들일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날은 가족 저녁 약속이 있었다. 예전같지 않은 조용한 식사 분위기였다. 저녁을 먹다가 조심스레 여쭤봤다. '내가 어제 말 한건... 어떻게 됐어?' 가족은 침묵에 휩싸였다. 당시 18살이었던 남동생은 '뭔데 뭔데? 누나가 어제 뭘 말했는데???'라며 혼자만 모르는 것에 성질이 난 모양이었고, 엄마는 나즈막히 '누나가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대.'라고 답변해 줬다. 동생은 이어 '우웩! 미국! 허세 쩔어!'라고 고등학생 답게 큰 리액션을 보여줬다. 동생의 과장된 리액션 속에 아빠도 덤덤히 입을 뗐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우리 집 사정에 미국 유학은 힘들어.'


알고 있었다. 모두 짐작했다. 덤덤히 받아 들이기로 했는데, 그럴 자신이 있었는데. 아빠의 다음 말 부터가 잘못이었다.


'사람은 현실적인 꿈을 꿔야 해. 물론... 아버지도 사정이 된다면 당연히 보내주고 싶지. 그래도 못 보내는 게... 이렇게 말 하는 게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였다. 아빠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아빠가 대체 왜 미안해야 하는가. 다 내 욕심 때문인데. 충분히 지금도 너무 잘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만 쭉 살아도 아무 문제 없었는데. 괜히 내 욕심 때문에. 내가 주제도 모르고 꿈만 커서 이렇게 된 건데. 아빠가 나한테 뭘 잘못 했는데. 오히려 지금까지 풍족하게 누릴 거 다 누리게 해 주신, 최고의 아빤데. 너무 감사한데. 감사하다는 소리만 들어도 모자랄 사람인데. 내가 뭐라고 아빠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뱉게 하는가.


그게 너무 미안해서 식사 도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유학을 못 간다거나- 목표가 좌절됐다거나- 그런 이유로는 전혀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정말 죄송했다.  동생은 연거푸 '운대요~ 운대요~'를 반복하며 나를 놀렸고, 상대적으로 내 소리를 묻히게 해 줬다. 고마웠다.




그 날 밤, 나는 방에 들어 와 바로 노트북을 켰다.
바로 넥스트 스텝을 찾아야만 했다.


계획도 없어지고, 절망만 가득한 이 시점. 이 시기를 길게 하면 안 됐다. 슬퍼하기만 해 봤자 해결되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 차리고 현실을 인지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에서 빠르게 다음 계획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게 그냥 내가 살아온 방법이었다. 무수한 실패가 있었지만, 그냥 바로 정신 차리고 PLAN B를 찾는 것. 그렇게 살아야만 했고, 그렇게  살다 보니 자연히 몸에 베어 그런 사람이 됐다.


뭘 하지... 뭘 해야 하지... 절대 평범히 다시 학교에 다닌다거나 그런 재미없는 계획은 안 됐다. 원래의 '해외'라는 목표는 충족하되, 정말 '끝내주게 멋있는 일'이어야만 했다. 유학 쯤은 가볍게 박살 낼 수 있을 만한 경험치도 쌓을 수 있는 일 이어야 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돈'.

최대한 적은 투자 비용이 기본 값으로 깔려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돈이 적게 들어야 했다. 더불어, 내가 그 곳에서 투자 비용 몇 십배의 돈을 벌 수 있어 흑자를 낸다면 금상첨화. 그리고 그 이상의 경험. 절대 어중간해서는 안돼. 누가 들어도 멋진 그런 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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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미친듯이 찾다 보니 '해외 인턴'을 발견했다.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너무 좋은 기회였다. 역시, 극한의 상황과 절박함은 항상 참 좋은 시너지를 낸다. 생각치도 못한 길을 찾아준다. '해외 인턴'이라는 길을 발견한 순간 나의 넥스트 스텝은 이것임을 직감했다. 하자. 할 수 있다. 해낸다.


그런데, 어떻게? 인턴 경험도 전무할 뿐 더러, 아직 고작 2학년을 마쳤다. 엄청난 어학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꼴에 회사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목표와 현실의 부조화가 왔다. 이건 어찌보면 미국 대학 합격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졸업도 못 한 병아리인 채로 미국 직장 찾기.


그래도? 다 꺼져. 다 할 수 있어. 어학 자격증? 지금 당장 만들면 돼. 스펙? 지금까지 해 왔던 거 포트폴리오로 끝내주게 만들어서 많은 듯 뻥 치면 돼. 인턴 경험? 있는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잘나면 돼.


그렇게 나는 바로 2곳의 해외 인턴 채용 일정을 잡고,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바로 어학 자격증 시험을 신청했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포트폴리오 만들기에 돌입했다. 모두 유학을 거절당한 당일 밤에 이뤄진 일들이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역시 가장 절망적일 때 일의 능률이 제일 좋네... 하며 한 숨 돌리고 있는데. 아빠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아직도 아빠의 미안해하시는 얼굴이 잊혀지지 않아 괴로운 상태였는데. 얼굴을 보니 더 미안하기만 하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던 아빠의 말이, 내 평생 원동력이 되었다.


'네 PT 좋았다. 네가 설득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부모님 앞에서도 그런 실력이라면 너는 어딜 가도 잘 할거야. 다만...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거야."


아빠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바로 방을 나가셨지만, 혼자 남겨진 나는 닭똥같은 눈물을 몰래 흘렸다.

내가 너무 싫었다. 쓰레기같은 인간. 내가 뭔데. 고맙다, 멋지다 라는 말만 평생 듣고 살아도 모자랄 훌륭한 아빠 입에서 스스로 '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나오게 만드나. 


결심했다. 앞으로는 스스로 모든 걸 해낸다. 그것도 아주 멋진 일을 한다. 다시는 아빠가 저 생각을 못 하게 한다. 오히려 세상에서 제일 자식 잘 키운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 것이다.




그날 밤 나는 그렇게 독기를 품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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