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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선행의 대가

오늘에 부치는 편지

by 주원

무탈히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 아니, 사실은 상당히 바빴고 바쁘며 바쁠 예정입니다. 직장 말고도 개인적으로 매주 끝내야 하는 프로젝트들이 있습니다. 이미 남은 한 해 동안 할 일을 잡아놨어요. 그 와중에 매일 출근 준비를 하며 정치 뉴스를 듣고, 책도 읽고, 주식 시장도 봐야 하고,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도 하고, 요리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주말엔 수업도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쁨이 썩 힘들진 않습니다. 오히려 기쁘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 그것이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실 글 쓸 시간은 없지만 무언가 남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 브런치에 접속했습니다. 오늘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점심 회식을 했어요. 또 제 차를 타고 가야 해서 조금 마음에 잡음이 일었습니다만(기름값은 주신다고 했으니 뭐...), 어쨌든 다수의 행복을 위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식당은 가깝지도 않았는데 또 주차장도 비좁더라고요. 자리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비상등을 켜고 우선 동료들을 식당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마침 한 중년의 차주분이 옆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타려고 하시더라고요. 창문을 내리고 혹시 차를 빼시는 거냐고 여쭤보자 껄껄 웃으시며 '차 빼지 말까요?'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도 웃으면서 '아니요~ 제발 빨리 가주세요'라며 농담을 주고받았어요. 처음 보는 사람과 이런 농담도 하다니, 어쩐지 사람들을 대하는데 익숙해진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쨌든 그 차주분과 식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차를 도와준 동료 덕분에 무사히 주차를 마쳤습니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자리가 없어서 카운터 앞 벤치에 앉아 기다려야 했어요. 뒤이어 한 중년의 부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는데, 웨이팅 기계가 있는 것을 모르고 체온만 측정하고 밖에 나가서 기다리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셔도 식사는 하셨겠지만 뒤에 온 분들에게 순서를 뺏길지도 모르니까 노파심에 웨이팅 기계에 핸드폰 번호를 등록하셔야 된다고 알려드렸어요. 마침 자리가 나서 부부를 지나쳤는데 그때 남자분이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도 여기 앉아있다가 사람이 오면 이렇게 하라고 알려주자.'


난 그런 선행을 원합니다. 선행의 대가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닌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로 가는 그런 것을요. 그것이 돌고 돌아 내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오면 더 좋겠고요. 너무 이상적인 가요? 몽상가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이상적인 사람들이 있어야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상 없는 현실은 또 얼마나 팍팍합니까. 선행의 대가로 들은 말 덕분에 한결 부드러운 마음으로 식사를 마쳤습니다.


돌아오는 길엔 붉게 물든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가을보다 겨울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자연은 늘 그렇듯 순서를 지킵니다. 스물두 살 이후로, 가을이 올 때마다 숨이 막히고 망망대해에 홀로 부표를 끌어안고 있는 듯했지만, 올해는 어느 때보다 안정감과 충만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남은 올해의 가을이 그런 계절이기를 바랍니다.


다 썼으니 컴퓨터로 원래 하려던 일을 해야겠네요.

다음에 또 쓸게요.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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