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원 Apr 11. 2022

저녁 9시 육교 위 돈가스 냄새

육교를 건너려는데 튀김 냄새가 났다. 튀겼다고 다 똑같은 냄새가 나진 않는다. 이 냄새는 일식 튀김도 아니고, 분식집 튀김도 아니다. 어디서 맡았더라. 고개를 드니 육교 건너편에 고등학교가 보인다. 아, 그래. 분명해. 이건 급식소에서 돈가스를 튀길 때 나는 냄새다. 그러나 지금은 주말이고 저녁 9시가 훌쩍 넘었는걸. 어째서 급식소 돈가스 냄새가 나는 것일까. 그것도 왕복 6차선 도로 위에서 말이야. 알 수 없지만 그 냄새는 육교를 넘어 어린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반이 두 개밖에 없는 작은 시골 초등학교였지만, 급식만큼은 맛이 좋았다. 몇 조각 안 되지만 장어 조림이 나오기도 했고, 섬사람 아니랄까봐 소라 무침이나 성게 알 미역국이 나오기도 했다. 영양사 선생님은 아이들의 편식하는 습관을 고친다고 잔반통 앞에 서서 잔반 검사를 했다.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소라가 나오면 오랫동안 테이블 앞에서 버티다가 입안에 소라를 잔뜩 넣고 일어섰다. 잔반 검사를 받고 급식소 밖으로 나와서 입안에 있던 소라를 모조리 휴지에 뱉었다. 그리고는 급식소 건물 옆에 있던 쓰레기 소각장에 휴지를 던졌다. 소라 말고 소시지나 주지,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급식 반찬은 돈가스였다. 오전부터 학교에 튀김 냄새가 번지면 굳이 주간 식단을 찾아보지 않아도 돈가스가 나올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모난 돈가스 일까? 동그란 미니 돈가스? 어쩌면 생선가스일지도 몰라,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메뉴를 추리했다(소라 돈가스는 어떻냐고? 그건 사절!). 우리 학교는 돈가스와 함께 케첩이 아닌 데미그라스 소스를 줬다. 급식 돈가스는 식당에서 사 먹는 것보다 고기가 얇고 훨씬 질기고 눅눅했지만, 난 그 돈가스를 참 좋아했고 지금도 그리워한다. 오전 내내 빵가루를 묻히고, 뜨거운 기름 앞에서 돈가스를 튀긴 인물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일까?


전업 주부였던 엄마는 어느 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급식소에 나타났다. 하얀 모자와 가운, 핑크색 앞치마를 입고 스텐 식판 위에 반찬을 덜어주는 모습으로. 나 말고도 이미 여러 학생들의 어머니들이 조리원으로 일하고 계셨기에 누군가의 어머니를 급식소에서 보는 건 별스런 일이 아니었다. 놀림을 받을 일도 아니었고. 나도 학교에서도 엄마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우유 당번이어서 우유 상자를 가지러 급식소에 갈 때, 여러 어머니들 틈에서 엄마를 찾아 인사를 하고 돌아올 정도였다. 전업 주부로 혼자서 집을 지키던 엄마 역시 새로운 활력소를 찾은 것 같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의 손엔 급식소에서 생긴 잔반이 들려있을 때도 있었다. 잔반은 그대로 밥상 위에 올라갈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카레 돈가스나 돈가스 덮밥 같은 새로운 메뉴로 탄생했다. 양이 많을 땐 같은 골목에 사는 친구들의 집에 가서 나눠주기도 했다. 친구들과 나는 각자 다른 꿈을 꾸고 다른 고민을 했지만, 같은 밥을 먹으며 자랐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얼마 가지 못했는데, 잔반을 모두 폐기처분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곧 중학생이 되었고.


나는 급식소 돈가스 냄새에 취해 육교를 건너고도 얼마간은 지나간 날들의 식사를 떠올렸다. 엄마가 늦잠을 잤을 때만 먹을 수 있었던 마가린 간장 밥, 우리 가족의 여름 한정 메뉴인 오이냉국(식초가 아닌 간장 베이스라는 것이 특징이다), 엄마가 한 것보다 맛있는 아빠의 생선 조림, 숙주나물과 두부, 백김치, 돼지고기 등을 섞어 속을 만들고 통통하게 빚은 만두, 토요일 점심에만 먹을 수 있었던 아빠 표 칼국수... 그런 것들이 밥상 위로 올라왔다가 사라진다. 어렸을 적에는 가족과의 맛있는 한 끼가 당연한 일인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입학 이후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가족 식사는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맛있게 많이 먹을 걸.


한 달 전쯤에 엄마와 크게 싸웠다. 엄마와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고,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통화를 했는데 한 달 동안 전화는커녕 정말 필요한 게 아니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엄마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선 ‘이쯤 됐으니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란 신호를 보내지만, 그럴 때마다 뭔가가 자꾸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대신 가을을 맞아 밤 한 상자를 본가로 보냈다. 받았다는 데도 별 얘기가 없어 궁금하던 차에 아빠에게 메시지가 왔다. 읽어봤지만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쓴 지 30년 가까이 된 아빠는 아직도 문자 입력에 서투르다. 때마침 엄마에게 해석본이 왔다. ‘밤이 맛있구나. 한 박스 더 보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이었단다.


여전히 엄마 아빠와 잘 연락하지 않지만, 밤 한 상자는 더 보냈다. 집 근처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밤 산책을 하러 길을 나선 차에 육교 위에서 돈가스 냄새를 맡은 것이다. 우리 가족이 언제 다 같이 밥을 먹었더라? 올해 4월이 마지막이었구나. 그것도 2년 만이었던가? 다음은 또 언제일까.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아빠의 머리가 다 빠졌다는 소식에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만 나는 조만간 적절한 때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가 함께 밥을 먹는 때도, 그리고 내가 부모님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때에도. 우리가 식탁에 모인 날에 나는 돈가스를 튀겨볼까 한다. 데미그라스 소스도 함께 곁들여서. 웬 돈가스냐, 하면 ‘기억나? 엄마가 급식소에서 일하던 시절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의 추억이 담긴 맛있는 한 끼를 함께 맛볼 수 있게.


(2021. 12. 8)

         

매거진의 이전글 식물을 키우면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