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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Jun 15. 2019

식물을 키우면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난 더럽게 식물을 못 키운다. 시작은 초등학교 수업시간 때 우유팩 화분에 심은 콩이다. 분명 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했고 물도 정성껏 주었는데 친구들과는 달리 나의 화분에는 싹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 무언가가 올라오길래 새싹인 줄 알고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잡초였고 그것을 깨달은 직후 바로 우유팩 화분을 뒤집어 화단에 털어 버렸다. 그 기억이 흙 속의 콩처럼 머릿속에 콕 박혀서, 식물을 키우는 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우유팩 화분을 시작으로 희생양들이 속출했다. 친구가 선물로 준, 물을 거의 주지 않아도 잘 자란다는 선인장을 죽였고 너무 잘 자라서 탈이라는 바질은 뜯을 잎이 없을 정도로 빈약했다. 키우기 쉽다는 수염 틸란드시아는 창문에 걸어둔 지 한 달 만에 말라죽었고 (나중에 꽃집에서 들은 얘기로는 수염 틸란드시아는 키우기 어렵다고 한다. 다행이다.) 작년에 선물 받은 틸란드시아는 열심히 키워보려고 물도 제때 주고 창문을 열어 바람도 쐬어주며 근근이 키워왔으나 바빠서 일주일 정도 한 눈을 판 사이에 또 말라서 죽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계셨던 분이 키우다 두고 간 알록달록했던 선인장은 내가 책상을 쓰기 시작하고 몇 개월 뒤에 색깔이 칙칙해지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멀쩡한 것들도 내 손에 들어오면 말라죽거나 익사해서 죽었다.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이보다도 더 많은 식물들이 나로 인해 요절했다. 식물이어서 다행이지, 식물인권위원회가 있었더라면 진작에 고발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계속 키우고 있는 식물이 있는데 바로 스투키다. 이 친구와 함께 한 지 2년 정도 됐다. 이 친구는 물 주는 것을 두 달이나 까먹어도 알아서 잘 자란다. 그렇게 방치하는데도 어찌나 잘 자라는지 새순도 여러 개 났다. 좁은 화분에서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이 부러울 정도다. 스투키를 들이고 벌써 세 군데의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스투키를 보고 있노라면 전우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

무민과 함께 잘 자라고 있는 스투키


  식물을 그렇게 못 키우는 주제에 이상하게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식물원에 가는 걸 즐기게 됐다. 식물원은 따뜻하고 대체로 사람이 없어 조용하고 초록색을 보면 활력이 차오른다. 그래서 이번에 이사를 하게 되면 꼭 식물 키우기에 다시 도전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엄마는 이사를 축하한다며 스파티필룸이라는 식물을 선물로 주었다. 그 이후에 인터넷 신청을 하고 사은품으로 올리브 화분도 받았다. 물을 주는 것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두 친구들은 잘 자라주었다. 스파티필룸은 들인 지 한 달 뒤부터 계속 꽃을 피워내고 있고, 올리브도 조금씩 키가 자라고 있다. 자신감이 생겨서 최근엔 극락조와 아이비도 들였다. 극락조를 사면서 난생처음 분갈이도 해 보았는데 다행히 죽지 않고 (아직까진) 잘 자라고 있다. 영양제도 사서 꽂아줬다.


 화분에 물을 주던 어느 아침,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재능이 없어서 식물을 기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내가 정말로 식물들을 애지중지 여겨왔던가? 화분을 들이고 며칠, 몇 주 동안은 매일 화분을 쳐다볼 정도로 관심을 가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분의 존재조차 잊어버렸다. 물 주는 날을 잊고 '내일 주면 되겠지'라고 넘기거나 '지난번에 못 줬으니 많이 줘야지'라며 물을 넘치게 주곤 했다. 식물뿐만 아니라 뭐든 그런 식이었다. 새로 시작한 취미든, 연애든, 공부든, 심지어 게임도 시작은 뜨거웠지만 그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고선 난 재능이 없다 보다고 포기하곤 했는데 나에게 없는 것은 재능이 아니었다. 적절한 양과 온도의 관심과 애정,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노력. 바로 그것들이었다.


  여행을 가게 되어서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우게 되었다. 목이 마를까 물을 듬뿍 주고 떠났는데 돌아와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스파티필룸의 잎과 꽃이 누렇게 되어 축 쳐져 있었다 (다행히 다른 아이들은 멀쩡했다). 급하게 물을 줬는데 다행히 며칠 지나니 두세 개의 꽃을 제외하고 다시 싱싱해졌다. 화분이 많아졌지만 요새는 잊지 않고 각 화분마다 적절한 양의 물을 주고 햇빛이 좋을 땐 잠시 광합성을 할 시간을 주기도 한다. 몇 달 뒤에는 어떻게 되어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핑계 대지 않고 최선을 다 해보려고. 식물을 오래 잘 키울 줄 안다면 사랑도, 일도, 성숙도, 아니 뭐든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식물을 키우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



https://brunch.co.kr/@matilda-lee/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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