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원 Aug 09. 2024

8월, 과수원 또 풀베기(1)

2024년 8월 8일

장마철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처럼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그 불안감 제공처는 바로 과수원이었어요. 지난 5월에 예초를 했는데 장마철이 지나면 잡초가 무럭무럭 자라 거의 숲을 이룰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죠. 이전에 몇 번 과수원 옆을 지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흐린 눈을 하고 지나가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명확하게 잡초가 잘 보였어요. 이런 젠장! '미래의 내가 처리하겠지' 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하지만 불안감은 지워지지 않고 은은하게 번지고 있었죠.


여름 동안 단호박 수확을 하기도 했지만 본업이 바빠서 한동안 과수원엔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제가 바쁠 때 엄마 혼자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엄마는 과수원에서 혼자 일하는 게 싫대요. 뱀이 나올 것 같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무섭답니다. 실제로 동네 몇몇 아주머니들은 과수원에서 일을 하다가 어깨 위로 뱀이 툭 하고 떨어진 일을 겪기도 했대요. 저도 작년에 예초기에 꼬리가 잘린 뱀을 보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뱀보다 모르는 사람(대체로 모르는 아저씨)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순간이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초기를 들고 풀이 무성한 과수원에 들어가 풀을 베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요. 아니, 두려워할 수가 없죠. 그럼 이 일을 또 누가 하겠어요?


오늘은 새벽 5시 반에 눈을 떴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네요.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난 것치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습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선크림을 바르고, 그나마 바람이 잘 통하는 바지와 얇은 긴팔 남방을 걸치고 마스크와 모자도 쓰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차, 선글라스를 안 가져왔네요. 보호 안경이 있으니 그걸 써야겠습니다. 새벽 6시가 좀 넘자, 한라산 옆으로 태양이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오늘따라 저 태양이 더더욱 반갑지 않네요. 풀 베러 가는 사람인지, 좀비가 된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과수원에 도착해서 예초기를 챙기려는데 뭐가 좀 이상합니다. 예초기에 달려있어야 할 칼날이 없어진 겁니다. 칼날이 어디 갔냐고 하자 엄마가 ‘어제도 그랬다’고 합니다. 어제도 그랬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네, 네. 이게 다 제가 직접 예초기를 챙기지 않은 탓이겠죠. 누굴 탓하겠습니까? 과거의 제가 예초기를 쓰고 정리한다고 이도날(칼날)을 빼놨다가 다시 껴놓지 않고 창고 어딘가에 쑤셔둔 탓이겠죠. 과수원의 풀들은 이미 마디가 두꺼워졌기 때문에 칼날이 아니면 자를 수 없어요. 나일론 줄로 했다간 나일론 줄이 두꺼운 풀에 끊어져서 줄을 10분마다 교체해야 할 겁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트럭을 타고 과수원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창고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칼날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죠. 창고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요. 옆에서 엄마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고 계시더군요? 아니 예초기 돌리는 건 난데! 왜 엄마가 한숨을 쉬나?! 나일론 줄로 예초하면 안 되냐고 하시네요. 안 됩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죠. 밥 달라고 옆에서 야옹 거리는 아옹이에게 칼날을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지만 대답해 줄 리가 없습니다. 벌써 남방 속으로 땀이 흐르기 시작해요. 갑자기 더워지니까 너무너무 집에 가고 싶은 거 있죠? 못 찾으면 집에 가야겠다 하는 찰나에 뭔가가 담긴 비닐봉지를 발견했어요. 제가 지난번에 예초기를 쓰고 청소할 때 쓴 붓과 랜치, 그리고 칼날이 담긴 봉투였습니다. 과거의 나야, 이걸 또 이렇게 야무지게 모아놨니.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할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 참 나.


다시 트럭을 타고 15분을 달려 과수원에 도착했습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어요. 양팔에 토시를 끼고, 종아리 중간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보호 안경을 끼고, 몸 구석구석에 모기 기피제를 뿌려줍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저의 시간입니다. 예초기에 달린 끈을 어깨에 두르고, 왼손으로 스위치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예초기로 바닥을 쓸면 절 위협하던 잡초들이 우수수 쓰러집니다. 히어로물에 나오는 최강 히어로가 이런 기분일까요? 그렇다고 해서 항상 기세 등등한 건 아닙니다. 종종 눈앞에 쳐진 거미줄이나 쓰러지는 잡초를 피해 나무로 기어올라가는 메뚜기를 발견할 때마다 몸이 움찔거려요. 선글라스 대신 쓴 보안경엔 자꾸 김이 서려서(김 서림 방지 기능 있대매!) 중간중간에 잠깐 벗었다가 다시 쓰기도 해야 합니다(보통 이럴 때 벌레들을 자주 발견합니다).


오늘 예초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어요. 나무들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꽤 선선했거든요. 지금보다 나무가 더 많으면 기후 위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란 생각도 했습니다. 예초하면서 혹시나 칼날이 돌에 맞지 않도록 신경을 계속 써야 하지만, 보통은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작업이 끝나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예초를 하면서 했어요. 내일 저녁에 할 수업도 미리 떠올리고요, 얼마 뒤에 있을 지인 결혼식에 입고 갈 옷도 떠올리고요. 그러다 벌써 호두만큼 커진 감귤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도 하고, 앞으로 몇 번의 예초를 더 해야 할까 계산해 보기도 하죠. 몸은 힘들지만 아마 예초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작년에 템플 스테이를 하며 만난 정관 스님도 밭일을 하며 명상을 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물론 제가 하는 건 명상보다는 잡생각에 가깝지만 말입니다.


첫 번째 배터리를 다 쓰고 두 번째 배터리도 거의 다 써 갈 무렵(배터리는 한 번에 약 40분에서 1시간 정도 쓸 수 있습니다), 엄마가 절 부르네요.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얼굴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집에 가자고 하십니다. 제가 예초기를 쓰는 동안 엄마는 제가 미쳐 다 베지 못한 귤 나무 주변의 풀들을 정리했는데, 아무래도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몸에 무리가 됐나 봐요.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집에 돌아가야겠습니다. 사실 우리 과수원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라서 귤 농사를 짓는 일반 농부라면 하루 이틀 사이에 다 끝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베테랑도 아니고, 배터리도 얼마 없고, 체력도 대단치 않으니 매일매일 조금씩 해나갈 수밖에요. 오늘 저녁, 내일 새벽, 모레 새벽… 아니 어쩌면 8월이 끝나갈 때쯤에 예초를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우리 귤 나무들을 그 많은 잡초에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다행히 모기에 물리지 않았어요. 모기도 너무 더워서 살 수 없나 봅니다. 아니면 아까 뿌린 모기 기피제가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도요. 대신 허벅지에 멍이 대여섯 군데 들었네요. 예초기를 다리에 계속 부딪혀서 생긴 것 같아요. 뭐, 이 정도면 수월한 작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더위를 피해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태양이 힘을 잃을 때쯤에 다시 나와 나머지 풀을 벨 거예요. 오늘 제 목표는 전체 풀의 ⅓ 정도를 베어내는 것이랍니다. 밥을 먹고 좀 쉬어야겠어요. 오늘 글은 여기서 이만!

매거진의 이전글 12월, 못난이 귤 사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