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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Aug 09. 2024

8월, 과수원 또 풀베기(2)

2024년 8월 9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새벽 5시 반에 알람이 울립니다. 밤 11시 조금 넘어서 잠든 것 같은데 눈이 잘 떠지지 않았어요. 어제 오후 5시 반에도 과수원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예초를 더 하고 왔거든요. 덕분에 과수원 면적의 절반 정도는 예초를 마쳤어요. 좀 더 자고 싶지만 오늘과 내일까지 부지런히 예초를 해야 휴가를 떠날 수 있습니다. 엄마에게 굿모닝 인사를 하고 체중계에 올라가 봤는데 그저께보다 무려 2 킬로그램이 줄어든 거예요. 체중을 줄여나가고 있는 중이라 기분은 좋았지만, 어차피 수분 무게일 테니 조금만 기뻐하기로 합니다. 모레쯤 되면 다시 회복할 게 분명해요. 살을 빼고 싶나요? 그럼 농사를 지으세요!


새벽 6시 20분. 예초를 시작합니다. 보안 안경에 김이 서려서 그랬는지 어제 풀을 벤 자리가 영 말끔하지 않아요. 그래도 일단 제 키만 한 풀을 처치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겠죠. 저도 작년 여름에 이 예초기를 구입했어요. 예초라는 것도 그때 처음 해보았구요. 전에는 아빠가 풀을 베셨거든요. 아빠가 쓰던 예초기는 휘발유를 쓰는 예초기였어요. 엄청 무겁고, 엄청 시끄럽고, 엄청나게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지만 성능 하나는 무지하게 끝내줬습니다. 아빠는 몸이 좋지 않아 외출도 잘 하지 않던 시기에도 예초기를 짊어지고 풀을 베었어요. 아빠 말고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당시엔 예초기가 하나밖에 없었고 예초기를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저와 엄마는 아빠가 풀을 베고 지나간 자리를 낫으로 정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아빠는 20분마다 앉아서 얼굴 위로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연신 닦아냈어요.



"나 사실 아까 잠깐 기절했었다."

아빠의 예초기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앉아서 쉬고 있나 보다 했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빠는 당신이 벤 풀 위로 쓰러져 있었다는 겁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이 전기 예초기를 주문했어요.



예초기는 다루기 어려웠습니다. 전기 예초기라 휘발유 예초기보다 훨씬 무겁지만 그래도 무겁긴 마찬가지였어요. 예초기는 줄날이나 칼날을 장착해서 사용하는데, 예로부터 매년 벌초를 하는 제주에선(벌초 방학도 있었답니다) 칼날과 돌이 부딪히며 생긴 파편이 다리에 튀어 다리를 자르는 사고들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저에게 꼭 줄날만 쓰라고 당부했어요. 그런데 우리 과수원 잡초는 너무 두껍고 단단해서 풀이 아니라 줄이 끊어지는 겁니다. 작년까지는 아빠와의 약속을 잘 지켰지만,  새끼손가락만큼이나 두꺼운 잡초를 줄날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와의 약속을 깨고 칼날을 장착하게 된 겁니다. 무섭진 않냐고요? 왜 무섭지 않겠어요. 칼날이 가끔 돌에 부딪히면 '쩡!'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때마다 돌이 정강이에 박히는 장면이 절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야, 이거 쩐(?)다' 칼날을 장착한 예초기는 정말 신세계입니다. 칼날이 없었다면 예초 이야기만 2주 내내 했을 지도 몰라요. 아빠도 아마 하늘 나라에서 흐뭇하게 제가 예초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걸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잔소리가 더 많겠지만)



풀을 베다 보면 넓지 않은 과수원에도 식성 같은 것이 있는 게 보입니다. 어느 곳엔 제 키만큼 자란 모시풀이 많고, 어느 곳엔 분홍색 꽃이 피는 풀들이 가득하고, 또 과수원 가장자리에는 풀이 아니라 나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잡초들이 있어요. 그중에서도 제일 짜증 나는 잡초는 바로 '환삼덩굴'입니다. 이 잡초는 말 그대로 덩굴이라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타고 올라가 뒤덮어버린답니다. 게다가 알레르기까지 일으키는 생태계 교란종입니다. 줄기가 질기고 잔가지가 있어서 장갑이나 옷에 잘 붙죠. 미련 있는 사람처럼 누군가가 옷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면 어김없이 환삼덩굴이 옷에 붙어있어요. 나무에 엉킨 환삼덩굴을 제거하려고 덩굴을 마구 잡아당기면 귤 이파리나 채 익지 않은 초록색 귤이 가지에서 떨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어내는 일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당장엔 그것이 정말로 괴로울 겁니다. 허전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래도 잘라내야 하는 인연들이 있답니다. 거기다 이 환삼덩굴처럼 의존하기만 하는 관계라면 더더욱이요. 참고로 환삼덩굴은 탈모에 좋다고 하는데, 아직 환삼덩굴이 여기저기 퍼져있는 걸 보면 소문이 덜 났나 봐요.



윗 사진과 같은 곳입니다. 깔끔해졌죠?


벌써 10분 전 9시네요.  해가 뜨거워서 더 이상 하지 못하겠어요. 그래도 오늘은 배터리가 오래가서 무려 2시간 반 넘게 작업했답니다. 아침에 나올 때 목표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풀을 벴어요! 이제 내일 새벽에 한두 시간 잠깐 고생하면, 당분간은 이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일 또 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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