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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별하 Sep 26. 2021

[아르바이트 썰 ver.2-1] 편의점 에피소드


편의점 알바 후기를 쓰고 나서 생각난 에피소드가 있어서 뒷북으로 추가해 보고자 한다. 상당히 부끄러우면서도 안타까운 과거이자, 어찌 보면 흑역사와도 같은 사건이라 공개적으로 적기에는 민망하지만, 어쨌든 그 또한 나의 삶이었으니 적어보고자 한다.



때는 내가 세븐일레븐 야간 알바를 하던 시절로, 학교를 다니면서 수업도 가고 과제도 하는 와중에 일주일에 한번 아마 수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야간 알바를 하던 때였다.






문제는 이때는 내가 아직 바디프로필을 찍기 전의 일로, 극도의 우울감을 느끼던 시기라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어떤 정도였냐면 일주일에 수업을 14번을 가야 한다고 치면 2번을 겨우 갈까 말까? 하필 조별 과제가 엄청 중요한 수업도 그 학기에 수강을 하는 바람에 내 인생에 두 번 다시없을 민폐 조모임을 하기도 했었다.




갈수록 우울이 심해지면서 처음에는 나한테만 영향이 있는 것들을 포기하기 시작하다가-과제를 안 낸다던가, 수업에 안 간다던가 하는 식- 정말 내가 마지노선으로 지키던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다"라는 원칙마저 조모임을 무단으로 몇 번 안 가면서 깨지게 되었다. 일상을 망쳐갈수록 증상은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이제 조모임까지 안 갈 정도로 쓰레기가 되었다는 생각에 더 자조감이 몰려오곤 했다.




이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 실제로도 죽고 싶단 생각을 하루가 멀다 하고 하던 시기였다. 자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하면서 기숙사에서 죽으면 룸메한테 너무 못할 짓이니까 근처에 있는 강에 빠져 죽을까-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조모임과 비슷한 맥락으로 당시에 하던 알바 역시, 아무리 내가 나락으로 떨어져도 알바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을 해서 제대로 일을 했었는데, 정말 어느 한순간 핀트가 나가버리면서 출근시간 20분 전에 자다가 눈을 떴는데 그대로 핸드폰을 끈 채 다시 자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이성적으로는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후다닥 나가야 하는 시간인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말 이성이 내 몸뚱아리를 통제할 수 없고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내가 저럴 수 있었을까 싶은데, 저 때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고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었으니... 이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장님께 상당한 민폐이자, 돈을 받고 하는 일에 대한 직무유기임에는 변함이 없다. (알바 무단결근은 알바인생 7년을 통틀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원래 점장님이 오후 타임을 하다가 밤 10시에 야간근무자가 오면 자정까지 물건을 채워주다가 집에 가시는데, 그날은 내가 안 온 데다가 전화기까지 꺼져있으니 할 수 없이 점장님이 퇴근을 못하고 내 시간까지 연달아 밤샘을 하셨다.




나는 폰을 끄고 처음에는 한 번도 이래본 적이 없어서 심장이 빨리 뛰고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잠이 달아나 계속 침대에 누워 어떡하지라는 생각밖에 못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피곤인지 몸의 우울인지에 지쳐 잠에 들기는 했었고, 눈을 떠보니 새벽 6시였다.




이미 시간은 지나가버렸고 남은 건 과거의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현재의 나의 뒷감당뿐이었다. 그것도 이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 저질러진 채로. 이대로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일단은 휴대폰을 켰다.




켜보니 밤 10시 이후를 시작으로 점장님의 카톡과 문자, 부재중 전화가 잔뜩 와있었고 11시 이후에는 포기하신 듯하다가 새벽 3,4시가 되니 도저히 안되겠었는지 오늘 낮에 원래 본인이 근무하시는 타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대신 나와줘야 한다고 절규 섞인 문자가 마지막이었다. 제발 그 시간에 내가 올 수 있다는 답장 하나만 달라고 그래야 내가 지금 퇴근하고 집에 가서 잘 수가 있다면서, 어제부터 20 몇 시간째 잠을 못 자고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자기 절대 또 못한다고.




무슨 정신으로 답장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그 시간에 일을 하라는 점장님 말씀에 무조건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그 시간에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노라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날 원래 점장님이 해야 할 시간에 대신 근무를 하고,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도저히 다음 주 수요일에 출근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낯짝으로 점장님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대로 짤려버려도 할 말이 없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음 주 수요일이 오는 동안 편의점은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고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도저히 출근을 할 용기가 안 났지만, 그렇다고 또 한 번 더 무단결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예 그만둬버리기에는 후임한테 인수인계도 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결국 야속하게도 시간은 흘렀고, 나는 9시 45분에 편의점에 들어갔다. 원래는 출근을 하면 점장님과 인사를 주고받고 나는 옷을 갈아입고 시재가 맞는지 세어보러 가고 그때부터 점장님은 물건을 채우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그날은 나를 발견한 점장님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물건을 채웠다. 나도 일단은 눈치가 보여서 먼저 인사는 못 드리고 우선 내 자리로 가서 일을 했다.




다행인지 뭔지 그날따라 평소보다 훨씬 바빠서 밤 12시가 될 때까지 중간에 서로 잠시 얘기를 나눌 짬이 안 날 정도로 나는 계속 계산을 하고 점장님은 계속 물건을 채우셨다. 처음에는 바빠서 다행인가 싶다가도 이내 이 바쁨이 지나가고 나면 어떻게 하지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약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도대체 이 상황에서 점장님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 고민밖에 안 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결국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죄송하다는 말밖에 없었다.




그래서 12시쯤 이제야 드디어 한숨 돌릴 타이밍이 오고 점장님이 포스기 근처로 걸어오셔서 앉으려고 하시길래 냅다 90도로 인사를 하며 점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라고 했다. 점장님께서는 나를 한번 흘끗 보시더니 자리에 앉아 약 1분간 멍을 때리시다가 카운터 쪽에 있던 종이컵과 커피믹스를 꺼내시면서 "커피 마실래?"라고 물어보셨다. 그게 그날 출근해서 들은 점장님의 첫마디였다.




냉큼 마시겠다고 하고선 점장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렸다. 한 모금 훌쩍하시더니 약간 과거를 회상하는듯한 표정으로 그날 딸도 데려다줬어야 했고 전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너무 힘들었다면서 얘기를 하시는데 그게 나를 질책하거나 나를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정말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나 그날 이랬었잖아~'하는 느낌으로 아주 담백하게 말씀을 하셨다.




거기서 나에 대한 적개심이나 분노, 짜증 등은 정말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딸과 얘기를 나누듯이(점장님의 나이가 우리 엄마 또래) 나 오늘 이런 일 있었잖아 하는 느낌으로 말씀을 하셨다.




듣는 나는 그 모든 피곤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내 양심이 나를 찌르기는 했지만, 점장님의 말이 나를 찌르지는 않았다. 그러고 점장님께서는 그 흔한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으시고는 유유히 퇴근을 하셨다.






점장님이 가시고 새벽에 혼자 남겨진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일단은 걱정했던 일에 대한 안도감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아, 그래도 짤리지는 않았구나. 점장님이 그렇게까지 화가 나시지는 않았구나.




그다음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창피와 점장님에 대한 감사함이 한데 뒤섞여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도대체 내가 저런 분께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어느새 참된 어른이란 저런 거지란 생각에 이르기까지.




살면서 이 정도로 남한테 잘못해 본 적도 처음이었지만, 이 정도로 세련되고 상대방의 큰 그릇이 느껴지는 용서도 처음이었다.




그 뒤로 나는 점장님께 무한 충성을 속으로 다짐하면서 두 번 다시는 점장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대타를 부탁하시면 다른 일정이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무조건 하겠다고 했고, 후에 1차 기숙사에서 학생회관으로 점장님이 옮겨가셨을 때도 나도 같이 학생회관으로 넘어가서 알바를 하기도 했다. 동시에 누가 나한테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나도 한 번은 이렇게 용서해 줘야지라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나의 지난 잘못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라도 해야 점장님을 계속 볼 염치가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뒤로는 점장님을 더 이상 실망시켜드릴 일이 없어서 원만한 관계로 잘 마무리가 되었지만, 두고두고 그때 내가 참 인생의 끝자락에 있었구나 싶은 창피한 사건이다.




다음에는 또 다른 알바 후기로 찾아오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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