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유치원에서 전화가 온 적이 있다.
아이는 방학 이후 부쩍 자란 친구들과 자신의 키를 비교하고 있었다. 자기가 제일 작다고 속상해한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기대만큼 똑바로 그려지지 않으면 갑자기 심한 짜증을 내기도 한다 했다. 요즘 아이의 생활을 알려주셔서 감사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사람마다 자라는 속도가 다르다'라고 알려주신다고 했다. 집에서도 똑같이 알려주기로 약속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아이의 비교하는 버릇은 사라지지 않았다. 줄을 설 때도 맨 앞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아무래도 자라는 속도조차 경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남보다 더 빨리 크고 싶은 것이다. 안 그래도 가끔씩 "애들이 색칠 삐뚤게 됐다고 놀려요."라고 말하던 참이었다. 심지어 아예 크레파스에 손도 대지 않으려고 했다. 원하는 그림의 기준은 저만큼 높은데, 자기의 현실은 그보다 멀어서 포기하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자기의 속도대로 천천히 걸어가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어릴 적 앨범이 눈에 띄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 그리기와 만들기를 한 결과물과 그 무렵의 사진들을 모아놓은 앨범이었다. 차라리 엄마도 꼬마였다는 걸 알려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앨범을 꺼내오니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아이들은 엄마 그림을 보며 신기해했고, 엄마 사진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도 어린이였어요?"
"당연하지."
"엄마가 이거 그렸어요? 엄마도 장난쳤어요?"
"그럼. 너랑 똑같았지."
아이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줄수록 아이는 신비한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엄마도 이렇게 작았어. 근데 지금 엄마 봐. 엄청 큰 어른이 됐지? 모든 사람은 다 아가였다가 어린이였다가 어른이 되는 거야."
내친김에 아이들 어렸을 때 찍었던 사진들도 꺼내왔다. 아이는 자신이 이렇게 작고 약했다는 걸 보면서 깔깔댔다. 웃음소리와 함께 걱정도 멀리 사라졌다. '너는 엄마 뱃속에서 복숭아를 먹고 싶어 했어.'라는 말까지 덧붙여주니 자지러졌다.
'내가 너만 할 땐......' 하고 가르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어린 시절을 보고 듣는다는 건 특별한 일이 된다. 내가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보며 신기하고 뭉클해지는 것처럼.
이후 아이는 친구보다 키가 작다거나 무언가를 못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주변 어른들이 "이거 잘 먹어야 얼른 키 커지지!"라고 말할 때도 "사람마다 자라는 건 다 다른 건데...... 맞죠?"라며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요즘은 "사람마다 생긴 거랑 태어난 날이랑 자라는 게 다 달라요!"라고 말한다.
아이는 반드시 자란다. 그 자람을 내가 본다. 더 시간이 지나면 나도 나의 엄마처럼 '언제 이렇게 훌쩍 컸을까' 생각할 터이다. 자기의 곁을 내주며 어린 생명들을 키워내는 거대한 순환에 참여하고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