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어린이집을 졸업했다.
'둘째'고 '어린이집'이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막상 어린이집에 도착한 나는 당황했다. 최근 셋째를 낳아서 나오는 자체가 큰 일이었을 어떤 엄마와, 일하는 엄마를 대신하여 나온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든 엄마들이 꽃다발을 챙겨 왔기 때문이다.
졸업이라고 하니 꽃다발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졸업하는 날이 바빴던 게 핑계라면 핑계였다. 참석 자체에 의의를 두면서 무심히 빈 손으로 간 거였다. 잠시 빈 손이 부끄러웠다.
미안할 틈도 없이 졸업식 행사는 시작됐다. 어린이집에서는 아이 각각의 특성에 맞는 상을 주었고, 미리 써서 보낸 엄마의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엄마들이 새삼 울먹거렸고, 아이들은 그에 화답하듯 율동을 보여주었다. 다만 우리 아이는 전혀 나서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해서 아이를 억지로 끌어내지 않았다.
이날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자기가 좋아하는 인형들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인형 목을 그러모아 스카프빕을 같이 묶어놓았다. '기린은 목도리가 없어서 멍멍이가 같이 빌려준대요.'라는 게 이유였다. 둘이 꼭 붙어 있는 인형들이 무심히 봐지지가 않았다. 문득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나는, 둘째를, 첫째의 동생 정도로만, 묶어서 생각하고 있진 않는 걸까. 챙겨 가지 않은 꽃다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무심함의 증거 같았다.
사실 말을 할 때만 편의상 첫째 둘째로 부르지, 태어난 순서로 중요도를 매긴 적도 없었다. 둘째로 말할 것 같으면 나름 똘똘하다 생각하기에 아무 기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유일한 딸이자 막내여서 안 예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둘째의 자람에 대해서는 '그땐 그렇지' 뭉뚱그려 이해한 적이 많았다. 키우고 나면 다 잊어버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둘째라서 더 작게 느껴지는 이 아이도 하나씩 발달해가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다만 엄마에게 있어 '모든 것이 처음이 되게 만드는' 첫째의 자람보다는 확연이 여유를 느꼈던 게 사실이다. 모든 둘째가 첫째의 자람을 반복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실은 둘째가 더 욕심 많고 지길 싫어한다. 자기만의 공간을 더 중시하고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도 강하다. 내가 알아주지 않은 만큼 더 오빠를 이기려 하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할 때 오빠가 동생을 질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아이도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 한편을 차지하게 되는 만큼 내 마음도 아이를 위한 자리를 더 넓혀줘야 할 것 같다.
둘째, 정도로 생각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