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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겨움 Apr 21. 2021

말이 통하지 않아도

포르투갈의 포르투,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할아버지, 아마도 기억 속에 제가 있으실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써요.

제게는 잊을 수 없었던 순간이 할아버지께도 고스란히 남겨져 있긴 할까 궁금하네요.

관광객이 매일마다 밀려드는 도시에서 산다는 건, 낯선 여행자들에게 일상을 내어주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일종의 책임감이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요. 전 그런 관광도시를 여행해본 경험은 많지만, 살아 본 경험은 전무하거든요.


할아버지를 길에서 만났던 날은 엄마와 함께 포르투갈의 매력적인 도시, 포르투에서 트램을 타고 여행하던 날이었어요.

1번 트램은 포르투에서 여행자가 꼭 해야 하는 다섯 가지 내에는 뽑힐 정도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유명한 건 다 해보는 주의인지라, 그날도 전 엄마와 트램을 타고 가다 내리고 싶은 곳에 정처 없이 내려서 걷고 있었어요.

날씨는 좋지 않았죠. 안개에 뒤덮여서 바다가 빼꼼히 보이는 정도였어요.

여행을 하다 보면 날씨에는 초연해져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에는 순응하고 그 안에서의 매력을 찾는 건 여행자의 몫이거든요.


엄마와 한참을 걷는데 갑자기 엄마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제가 해야 하는 일은, 가장 빨리 화장실을 찾는 거죠. 지도에도 없는 화장실 정보를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맞아요. 현지인 찬스예요.


근데 그 날따라 사람이 없었던 건지, 우리가 걷는 공간이 외진 곳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주변에 사람이 정말 없었어요.

겨우 가다가 할아버지를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뛰어갔으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할아버지 얼굴을 보며 나이를 가늠했을 때 앞으로의 대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뽝!하고 왔죠. 조금의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저만큼 할아버지도 영어를 하실 것 같지가 않았거든요.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죠.


그때 할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어요. 얼마나 목청은 크고 말하는 속도는 빠르던지, 상대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았죠. 그래서 전 구글로 빠르게 포르투갈어를 검색해서 ‘화장실’이라는 포르투갈어 단어를 보여드렸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또 랩을 속사포로 쏟아내셨죠. 제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배시시 웃자 할아버지는 본인의 차 뒤창에 뽀얀 먼지 위에 손가락으로 가는 방향을 그려주셨잖아요.


저는 영어로, 할아버지는 포르투갈어로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기똥차게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잖아요.

역시 세상 만국어는 영어가 아니라 손짓 발짓이라니까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알려주시는 방향으로 저는 엄마의 손을 잡고 힘차게 걸어갔어요. 엄마의 다급한 경보가 높아졌거든요.


쭉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라고 알려주셨는데...

이런... 왼쪽으로 꺾는 곳이 두 군데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여기에서 길을 헤매면 안 될 것 같다는 걸 엄마의 하얀 안색을 보고 깨달았죠. 어떻게 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 갑자기 저 뒤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어요.

할아버지였죠!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다만 손짓으로 이해했죠.

“거기 아니고, 그다음에서 왼쪽으로 꺾어!”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허리를 90도로 숙여서 감사함을 표현하고 다시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죠.

약 20 자국 정도 더 갔을까... 그때 또 할아버지가 뒤에서 소리치셨죠.

“그만 가. 너의 오른쪽 건물이 화장실이야.” 다급한 음성의 톤과 손짓으로 또 이렇게 기가 막히게 이해했어요.


엄마를 화장실에 안전하게 모신 후, 저를 따라서 끝까지 길을 알려주려고 오신 할아버지한테 감사하다고 꼭 말하고 싶어서 재빨리 나갔죠. 근데 할아버지는 이미 뒤돌아서 저 멀리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계셨어요. 그 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것뿐이었죠.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의 매서운 눈매와 속사포 포르투갈어 랩을 처음 마주했을 때, 편견이 있었나봐요. 불친절한 사람일거라는...

근데 말이에요. 길에서 만난 처음 보는 동양 여자애가 화장실에 잘 가는지 걱정이 되어서 잘 찾아갈 때까지 뒤에서 따라와 주면서 알려준 그 마음은 제가 감히 예상치 못했던 거였어요. 너무 따스하고 깊었죠. 전 할아버지를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행운아였던 거죠. (그 덕에 엄마도 평안을 찾으셨구요)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미치도록 감동스러운 거예요. 아무 연고도 없었던 사이, 아무 도움도 안 될 사이인데도 따듯함을 전하는 사람의 존재가 경이로운 거죠.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었던 도시와 풍경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요. 제가 엄마와의 여행을 마치고 한 번 더 포르투를 갔던 것도 할아버지 때문이랍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 이후로 볼 수 없었고, 제 손에는 얼굴도 이제 가물한.. 안갯속에서 사라져 간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만 남았지만...


그래도 말이에요. 할아버지.


전 그 날의 친절을 꼭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서울에서 큰 배낭을 메고 이리저리 헤매는 외국인을 보면 먼저 말을 걸고 도와줄 때도 그 낯선 외국인에게 따스함을 건네주는 존재, 길에서 받았던 친절을 다시 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그 마음 말이에요.


할아버지는 여전히 목청이 크신가요? 포르투갈어를 제가 못 알아들어서 랩으로 느꼈던 거겠죠? 알고 보면 엄청 천천히 말씀하셨던 걸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원래 못 알아듣는 언어는 비정상적으로 시끄럽고 빠르게 느껴지기 마련이거든요.


비행기로 10시간이 넘는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 여자가 있다는 건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그러나 누군가 사진 속 뒷모습을 보고 할아버지임을 알아차려서 꼭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3년이 지난 오늘도, 전 여전히 그 날의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울컥할 정도로 감사한 사람이 있다는 걸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정말 멋진 분이라는 걸, 꼭 유창한 포르투갈어로 누군가 전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으로..이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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