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맛 본 지옥
설마 했던 것들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남편은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했다.
평온한 일상은 산산 조각났고 행복하고 편안해야 할 집은 지옥이 되었다. 갑자기 어이없는 일을 맞닥뜨리자 현실감각이 떨어졌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힘들게 되고 그 상황 자체를 인정하는 것 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빨리 흐르거나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결해야하는 사람처럼 하나씩 정리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다쳤는지는 보지 못했다. 사고를 정리하고 수습해서 엉망이 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잠을 잘 수 없어서 뒤척이며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도 못했다. 머리 위에 잔뜩 먹구름이 낀 상태로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 밥을 먹이고 집을 청소하고 회사에 나가 일을 했다.
불행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켜서 불행의 뱃속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남편과 나는 결국 이혼하기로 했고 양 쪽 집에 이혼할 것을 알렸다.
그런데 양 쪽 집의 반응이 예상과 너무나 달라서 의외였고 헛웃음이 나왔다.
당장 이혼하라며 화를 낼 줄 알았던 친정엄마는 이혼만은 하지 말라고 울었다.
아들의 잘못 때문에 미안하다며, 그래도 이혼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할 것 같던 시가는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그걸로 이혼얘기 나오는 게 말이 되냐고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이혼을 원하면 맘대로 하라고 했다.
남편은 오남매 중에서 맏아들이었고 아래로 여동생이 넷이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장남이라며 대접받으면서 컸다. 공부도 곧잘 해서 부모님이 오냐오냐 하면서 키운 귀한 맏아들이었다.
시어머니는 우리아들 귀한 우리아들 노래를 부르셨고 시누 네 명도 우리오빠, 우리오빠 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자식이 있을까? 그런건 다 둘째 치고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적어도 상식적인 선에서 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상식의 기준이라는 게 달랐다. 보편적인 상식의 기준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는 딱딱한 벽에 대고 혼자 말하는 것과 같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시가의 그런 반응이 이혼 결정을 굳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물을 잔뜩 묻힌 채로 네가 더 더럽네. 이건 아니네. 맞네. 싸우는 모양이 수치스러웠다.
똥밭에서 뒹구는 기분이었고 그 곳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혼뿐이었다.
재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양육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것들을 이야기하고 이혼서류를 작성했다. 담담했고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눈앞에서 사라지고 관계를 끊어내고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언젠가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모든 것을 되돌리고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