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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Dec 21. 2023

겨울무는 꼭 사 옵니다

산골 겨울나기

  이상스럽게 따뜻한 12월이다 했더니 순식간 기온이 뚝 떨어져 버렸다. 아침엔 영하 18도 낮엔 영하 10도가량의 기온. 닷새 째 강추위인데 며칠 더 지속될 거라 한다. 산골 생활 10년 차로 이 정도 추위는 겨울마다 겪어왔다. 기억하기로 가장 최저 기온은 7년 전쯤이었나, 영하 25도였다. 해마다 세밑 한파 무렵엔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곤 했다. 한파특보가 길게 발효 중이긴 해도 견딜만하다 싶더니 지난밤은 좀 달랐다. 내 몸이 감지한 추위는 영하 30도였다고 엄살을 부리고 싶다. 밤새 어찌나 추운지 잠에 빠져들 수 없었다. 얕은 잠을 이어가다 가위에 눌려버렸다. 간혹 가위에 눌리는데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로 드문 편이다.   

  

  이번 가위눌림은 우습게도 한파 가위눌림이었다. 눈이 가득한 벌판 사이로 기차를 타고 가는데 사방에 거대한 눈더미가 쌓여 있었다. 미로처럼 막아서는 하얀 눈덩이 사이로 기차는 마구 달려가고, 기차 안의 나는 힘겹고 두려운 기운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이미 가위눌림인 걸 알아차려 어떡하든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썼다. 경험상 입 밖으로 소리를 밀어내기만 하면 곧바로 가위에서 풀려나곤 했다. 가까스로 깨어나며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언니'였다. 얼마나 애타게 불렀는지, 그 시각 먼 도시에서 가족들과 깊이 잠들었을 언니가 움찔했을지도 모르겠다. 꿈이라는 게 깨어나는 순간부터 지워지는 것이라 더 생각나진 않지만, 아마도 나는 언니와 같이 그 기차에 타고 있었나 보.   

   

  꿈에 그렇게 많은 눈이 등장한 것도, 눈 풍경이 그토록 괴기스러운 것도 처음이다. 현실에선 닷새 전인가 눈이 제법 내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내려 한 뼘이나 되는 두툼한 눈이 쌓였다. 눈 그치기를 기다려 눈삽을 들고 나서려다 저녁이 되어버렸다. 눈은 다음날 치워야 했으나 기온이 급하강해 얼어붙었다. 마을 도로까지 다닐 수 있게 한 줄로만 겨우 길을 내고 왔다. 그 이틀 뒤 저녁에도 눈이 좀 더 내려 애써 길 낸 것이 묻혀 버렸다. 그런 상황이 꿈에 나타난 건가 싶었다. 이제 눈이 녹기 전엔 차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올겨울은 정말 심상치 않대. 어쩌면 내년까지 우린 갇혀 지내야 할 거야."

  아침 커피 타임에 나타난 동생이 말했다. 그다지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우물만 괜찮으면 뭐."

  나도 말했다. 얼마나 더 추워질지 모르겠지만 날씨야 근심한다고 달라질 것 없고, 겨우내 우리가 마음 써야 하는 건 우물이었다. 집 마당에서 비탈길을 따라 100미터 아래에 지하수 수중 모터를 묻어둔 우물이 있다. 보온재와 열선으로 동파 대비는 철저히 해 두었다. 지하수만 별 탈 없이 나와 준다면 한두 달 외부 출입을 못 한다 해도 크게 곤란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난로에 땔 장작도 충분히 마련해 놓았고, 저장 식품도 어느 정도 비축해 두었다. 눈이 오기 전 읍내 마트에 다녀왔기에 당분간 먹을 신선한 채소도 있다. 특히 큼직한 겨울무는 세 개나 사다 놓았다.  


    읍내 마트에 가면 꼭 사 오는 것이 겨울무다. 달큼하고 싱그러운 맛에 인삼만큼이나 몸에 좋다는 겨울무. 겨울무는 확실히 여름철 무와는 맛이 다르다. 여름 생무는 맨입에 먹기 곤란하다. 맹물보다 밍밍한 데다 쓰고 아릿한 맛까지 느껴진다. 김치로 익히거나 불에 익혀야 먹을 만 해진다. 겨울 생무는 아무 양념 없이 그냥 먹어도 맛있다. 껍질만 벗겨 툭툭, 잘라먹을 때면 무를 추앙할 마음도 생긴다. 어둡고 탁한 흙속에서 어떻게 이처럼 맑은 빛깔의 달짝지근한 물기를 모았을까 싶다. 하지만 무서운 눈덩이에 질린 채 잠에서 깨어났을 때라면 아삭한 생무보다는 부드럽게 익힌 무조림이 먹고 싶어 진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먼 새벽, 그렇게 나는 난로를 지피고 커다란 무를 잘라 무조림 준비를 했다. 무겁게 가라앉는 몸을 다시 잠이 채가려 했기에 움직여야 했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한 번 가위에 눌린 뒤 또 잠들게 되면 이내 다른 가위눌림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피니 불안도 추위도 물러갔다. 장작이 기분 좋게 탈 때는 마치 고양이가 밥 먹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잘 마른 장작 하나를 집개로 난로에 넣어주면 붉은 불꽃이 춤추듯 너울너울 반기고는 또각또각, 한참 소리 내어 먹는다. 참 고소하게 맛있게도 먹는구나 싶다.

 

  난로 위 뚝배기에서 푹 익은 무조림은 내게 기차를 떠올리게 한다. 어라, 게다가 언니까지. 참 꿈이란 게 요상하다. 온갖 기억을 별 희한한 조합으로 만들어낸다. 어릴 때 언니와 단둘이 기차를 탄 적이 있었다. 언니는 중학교 2학년,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출발은 서울, 도착은 대구.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 온 다음 해 겨울방학 때였고, 고향 친척 방문이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대구에 사는 이모와 고모 댁을 하룻밤씩 거쳐, 시 외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산골 할머니 댁에 도착하는 경로였다. 지도를 펼치고 우리의 행보를 붉은 사인펜으로 표시해 가며 꼼꼼히 설명하던 아버지도 새삼 떠오른다. 한창 성장하는 두 딸에게 체험 학습을 시켜주고 싶었던 거라고 이해하면 되려나. 아무튼 기차 얘기로 돌아가서, 어른 없이 언니와 둘이서만 기차 여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그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당시의 흥분을 돌아보려면 상상이 끼어들 수 있다. 그럴 걱정 없이 가장 확실한 기억 하나만 꼽는다면 도시락이다. 기차에서 파는 얇은 나무곽 도시락. 기차에서 점심을 사 먹으라고 아버지가 일러두었을 것이다. 아마 판매원에게 도시락 사는 연습도 미리 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럴 정도로 좀 철저한 데가 있는 사람이다. 지나가는 사람을 어떻게 불러 세워 의젓하게 도시락을 샀을까, 는 모르겠고 도시락에 들어 있던 무조림만 또렷이 기억난다. 굉장한 기차 여행에서 산 특별한 도시락에 들어 있는 반찬이 아주 흔한 무조림이라는 것이 놀라웠고, 그게 평소 먹던 것과 달라서 또 놀라웠다. 아마도 간장 양념에 오래 조렸을, 아주 뭉근하고 달짝지근하고 짭조름하며 살짝 탄 듯 불맛까지 배어든 무조림이었다. 늘 보던 사람에게서 낯선 모습을 발견한 것처럼 언제나 먹어 왔던 무가 기차에 탑승해도 좋을 특별한 음식으로 내게 남게 된 것이다.


다시 눈 소식이 있다. 언제 읍내에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겨울무 두 개가 아직 남았다.      



  무조림 말고도 무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많다. 무나물, 무생채, 무채전, 무밥. 뭇국.

  


무밥, 무생채, 무 듬뿍 넣은 청국장
난로 위 뚝배기에서 조린 무조림
어릴 때 기차에서 먹었던 도시락은 달걀 대신 고등어조림이 있었던 것 같다



닷새 전 내린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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