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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숲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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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Aug 20. 2024

가재가 노래하는 곳

  30도 넘는 더위가 오래 이어지고 있다. 한낮 최고 기온이 35도까지 이르기도 한다. 습도도 높다. 매미와 밤벌레 소리가 번갈아 낮밤을 채우고, 때때로 대기 불안 빗줄기도 후두둑 지나간다. 팔월은 그렇다. 높은 기온과 습도, 대기 불안과 매미류 울림소리로 몸과 정신이 멍하다. 밤잠도 설치고 새벽잠도 설친다. 설치는 사이 생각인지 기억인지가 천장을 맴돈다.

   

  며칠 전 친구와 통화를 했다. 친구는 몸이 아프다. 가까운 존재의 아픔을 나는 도울 수가 없다. 사실 나 자신의 아픔도 도울 수 없다. 어떤 존재도 아프지 않은 세상이라야 살만할 것인데 세상은 아픔으로 유지된다. 아픔을 통해 태어나, 상대의 아픔을 통해 양분을 섭취하고, 아프면서 죽어가는 생명들.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있다면 우울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애쓰지 않아도 지구엔 빛과 어둠이 찾아드니까. 감정 없는 태양에 의해 세상은 어두워졌나 싶으면 또 밝아진다. 그것도 예측 가능하게 예외 없이.

 

  영화를 보았다. 아픈 친구 추천으로 보게 된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습지에서 살아가는 한 여자 이야기다. 아버지 폭력으로 엄마와 언니, 오빠들이 차례로 집을 떠나고 어린 여자, 카야만 남겨진다. 폭력 주체였던 아버지마저 떠난 뒤 카야는 습지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간다. 가까이할 것이라곤 자연밖에 없다. 습지에 사는 생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차츰 그녀 생활의 중심이 된다. 스스로의 생존 방식도 그와 함께 터득해 간다. 카야의 시선에 따라 흘러나오는 사유들은 담담하여 아름답다. 가령,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같은 말들. 습지는 "죽음이 아프게 뒹구는 자리에 새로운 삶의 씨앗이 싹트는" 순환의 공간이기도 하다. 인간 감상을 앞세우자면 잔인할 수 있지만 자연 언어엔 감상이 없다. 그저 섭리일 뿐이다.     


  이야기는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마을 청년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습지에서 혼자 사는 알 수 없는 존재에게 그 혐의를 씌운다. 온갖 루머와 상상이 덧붙여져 괴물 같은 이미지가 된 습지 소녀. 오래도록 그들 삶과는 상관없었던 그 존재가 재판 과정을 통해 다시 인식된다. 사람들 상상을 걷어내면 카야는 그저 습지에 버려져 홀로 살아온 외로운 존재일 뿐이다. 도움을 주는 이들의 노력으로 카야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오래도록 관찰해 온 습지 생물 생태 자료를 모아 출판하게 된다.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사랑을 알게 해 준 남자와 결혼도 한다. 그 뒤 자신의 습지에서 여전히 생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원한 대로 소란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영화는 남편이 그녀의 유품에서 발견한 조개 목걸이로 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조개 목걸이는 오래전 살인 사건의 유력한 단서였다. 카야가 죽은 청년에게 주었던 목걸이. 그것이 카야에게 돌아와 있는 것에서 남편은 짐작할 수 있었다. 습지에서 배운 생존 방식을 카야가 따랐다는 것.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쓸쓸한 영화인데 다 보고 나니 어쩐지 덜 쓸쓸하게 여겨지더라."

  친구는 말했다. 결국 혼자의 생이면서 모두의 생이라는 걸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았다고. 내 감상도 비슷했다. 더구나 늪지 풍경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그곳에서 저마다 혼자 살아가는 생물들의 삶이었다. 그것을 외로운 시선으로 보는 건 인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냥 살아가면 된다고 수긍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잔잔하게 채워졌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쉽게 흔들린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구입한 지 1년 지난 노트북은 광고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보안프로그램이 만료되었으니 갱신하여 보호하라고 했다. 또 알 수 없는 앱으로 화면을 갑자기 덮어버리고는 이 앱이 디바이스를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냐고도 물었다. 겨우 물리치자 이번엔 업데이트를 권한다. 모두 슬며시 떠올랐다 슬며시 기어내려 간다. 늪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려는 것 같다. 빠지지 않으려 외면하며 글을 쓰고 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야생이 야생답게 살아가는 곳이라는데, 현실에 그런 곳은 없는 것인가. 늪지는 죽음의 공간이면서 생명의 공간이다, 같은 말들도 이럴 때는 소용없다.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도망가자. 내 하루가, 이렇게 사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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