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서는 모두가 자기만의 리듬으로 걷는다
무료한 하루의 순간순간 산티아고의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풀냄새, 흙냄새 가득한 차가운 안개 바람.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뜨면 산티아고의 길 한가운데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뒤로도 앞으로도 보이는 사람 없이 혼자 걷던 길들도 공연히 떠오른다. 휴대폰 플래시를 끄면 제 발도 내려다보이지 않던 어두운 산길, 나란히 놓인 운하에 구름이 촘촘하던 새벽의 평야. 암흑이 무엇인지, 흰 새벽이 어떤 색인지, 나는 모두 산티아고에서 배웠다.
유독 산티아고가 많이 떠오르는 날이면 거기서 썼던 일기장을 펼쳐본다. 날이 지날수록 분량이 눈에 띄게 줄지만 매일매일 그날 지나온 마을의 이름과 걸은 km 수는 빼놓지 않고 적어두었다. 적게는 몇 km에서 많게는 33km까지. 중간중간 버스나 기차를 타며 하루씩 쉬어 가기도 했지만 걸은 거리만은 0.1km도 보태거나 덜어내지 않았다.
한 걸음을 나아가려면 한 걸음을 걸어야만 하는 그 길 위에서, 나는 1시간에 3km를 걸었다. 1시간에 3km를 걷는다는 건 1시간에 3km를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남들 따라 1시간에 4km를 걸으면 다음 1시간 동안 2km밖에 걷지 못한다. 평소의 2배를 쉬어도 부족할 만큼 회복이 더뎌져서다.
때문에 산티아고에서는 오늘 걸을 총 km 수를 생각하며 하루의 컨디션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컨디션이 좋다고 마구 걷다가는 마지막 두어 구간을 남겨두고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들게 된다. 알면서도 반짝이는 새벽 공기에 취해 쉬어야 하는 지점을 몇 번이고 지나친 날들이 수두룩하기는 하지만.
10분 거리 버스 정류장도 멀게 느껴지는 서울에서의 삶. 더 이상 몇 시간씩 내리 걷는 일은 없지만, 어디를 갈 때면 습관처럼 몇 km나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고 걸어서 얼마나 걸릴지 계산한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12km, 4시간이면 거뜬히 걸을 수 있는 거리다. 이렇게 버스나 지하철의 리듬이 아닌 나의 리듬으로 거리를 마주하면 새삼 길의 실체가 느껴진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옴짝달싹을 못 하든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든 얼추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통과되는 도로가 아닌,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오르막 내리막을 오르내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야만 걸어지는 진짜 길이 보이는 것이다.
가끔은 상상한다. 느지막한 퇴근길 듬성듬성한 가로등 주황 불빛을 받으며 집까지 걸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 속에서 차가운 밤바람이 매연 섞인 서울의 공기를 희석하고, 멈출 줄 모르는 차 소리가 도로를 빈틈없이 채운다. 늘 그렇듯 취객들은 갈지자로 걷고, 무엇에도 취하지 않은 이들은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무표정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오롯이 나의 리듬에 맞춰 걷는다. 부러 재촉하거나 오버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만의 리듬으로.
그렇게 서울의 12km가 나의 작은 산티아고가 된다. 사회의 리듬에 맞추느라 다소 삐걱이던 나의 리듬이 제 박자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