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이기적인 불효자다
"경과 보고 수술 잘 되면 그때 이야기하자."
엄마는 남동생에게 아버지의 발병 사실을 숨기려 했다. 나는 기분이 복잡 미묘했다.
'그럼 나한테는 왜 제일 먼저 알린 거지?'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데, 엄마는 나에게만 암환자 가족의 고통을 온전히 떠안기는 건가 싶었다. 낮엔 취재 다니고 기사를 써야 했고, 밤엔 간암 치료에 관해 알아보며 '주경야독'했다. 며칠 만에 나는 녹초가 돼버렸다.
"아니, 그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의 간암 발병을 나중에야 안다면, 분개할 남동생이 걱정됐다. 더 솔직하게는, 내 속에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엄마에게 따지다시피 했다. 왜 슬픔은 딸의 몫이어야 하나. 아들도 같은 자식인데, 좋든 나쁘든 집안일은 같이 짊어져야 하지 않는가.
어릴 때, 나는 남동생만 각별히 챙기는 엄마를 원망했다. 별 트집을 다 잡아서 '남녀 차별'이라고 엄마에게 대들었다. 허약한 동생이 밥도 통 안 먹어서 엄마가 따로 돈가스를 사줬다. 언니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그걸 보고서 분에 겨워 대성통곡했다. 유별난 둘째 딸이었다. 엄마는 내가 남동생과 엮이기만 하면 예민해진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동생이랑 엮였다 하면 왜 이리 호들갑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을 테다. 내가 '엄마의 비밀'을 알아버려서 그랬다.
나는 고모가 없고, 삼촌만 셋이다. 할머니는 아버지까지 아들 넷을 낳았다. 그 시절에는 뭐니 뭐니 해도, 대를 이을 '아들'이 귀중했다. 엄마는 맏며느리이고, 아들을 꼭 낳고 싶어 했다. 집안에 '장손'이 필요했다. 엄마는 첫째 딸을 낳았다. 둘째는 꼭 아들이길 바랐다. 그런데 내가 나왔다. 뜻하지 않은 둘째 딸이었다.
내가 열 살 때쯤이었다. 엄마가 불 꺼진 안방에서 누군가와 조용히 통화하고 있었다. 나는 불을 켜주기 위해 들어가다 말고 멈칫했다.
"둘째가 딸인 줄 알았지, 그땐 의사가 알려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안 낳을수도..."
그건 끝까지 듣지 말았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냥 엄마가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 후딱 돌아서버릴 걸 지금도 후회한다.
'딸'임에도 낳아줬으니,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나는 그러고 싶진 않았다. 대신, 나를 낳은 걸 후회하지 않도록 '삼 남매' 중 가장 잘 클 거라고 다짐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살뜰히 동생을 돌본 건, 내가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에야 내가 참 유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론 후회한다.
내가 성인이 되자, 엄마는 집안일은 물론, 하다 못해 결혼식에 갈 옷 고르는 일까지 나에게 상의한다. 얼마간 상냥한 딸로 문제도 신속히 해결해주고, 집안 대소사부터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까지 애써 다 들어주고 맞장구친다. 그러다 끝내 귀찮은 내색을 하고 만다. 나도 내 생활이 있는데, 또 내가 장녀도, 장손도 아닌데 엄마는 왜 나한테만 이럴까 짜증 나기 시작한다. 엄마는 나에게서 이런 낌새를 느끼는지 덩달아 화낸다. 그럼 결말은 언제나 배드 엔딩(bad ending). 언성 높여 싸우고는 한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는 신경전에 돌입한다. 그러다 "니는 어떻게 집에 전화 한번 안 하노"라는 익숙한 멘트로 엄마가 전화를 걸어온다. 다시 화기애애 모녀 모드.
엄마와의 다툼은 늘 기승전결이 명확했다. 특히, 결말에 승기를 잡는 건 항상 '나'였다. 부모 이기는 자식이, 바로 나다. 그 사실이 이제야 부끄럽다. 내가 엄마를 원하기보다, 엄마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게 더 절실한 걸 알면서 한 번을 져주지 않았다.
엄마 생일이면 어떻게든 잘 챙겨주려고 큰돈 들이고, 누구 결혼식 간다고 하면 꿀리지 말라고 가방부터 챙겨줬다. 여행 가자고 엄마를 꼬드기다 내 뜻대로 안 따라주면 성질을 다 부렸다. 그게 다 내가 사랑받으려고 한 짓이면서 '효도'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참 민망하다.
"가는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 일 나가서 가산점 받아야지."
동생은 지방 공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인턴 출신에게 공개 채용 시 가산점을 준다고 한다. 엄마는 혹여나 동생이 충격에 휩싸여 출근도 안 하고 병원으로 뛰어오면 공채 가산점을 받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했다. 그게 또 나는 '아들'만 챙기는 것 같아 영 못마땅했다.
'아니, 나도 지금 인턴인데. 내 코가 석자인데...'
마음 같아서는 엄마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다 불현듯 이 말이 '칼'이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아프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내가 할 일은 명확했다. 아버지가 다시 건강해지도록, 뭐든 하는 거다. 그리 해도 모자랄 상황에, 나는 내 기분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내 정신 차렸다. 내 앞에 스러져가는 아버지가 보였다.
"그래, 일단 놔두자. 만일 간 이식이 필요한 수준이면 그땐 알리자."
엄마와 나는 동생에게 아버지가 아픈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소심하고 걱정 많은 놈인 줄 알면서도, 굳이 슬픔을 나누자며 동생에게 내 속풀이 하려 한 게 한심했다. 무엇보다 나만 슬픔을 떠안았다고 생각한 게, 아버지에게 너무 미안했다. 너무 미안해서, 또 울어버렸다.
어떻게든 좋은 병원에, 좋은 의료진으로 아버지가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고향에서 간암 소견을 받았지만, 혹여나 하는 마음에 재차 확인하려 했다. 내 속엔 아버지가 간암에 걸린 게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으려는 게 있었다. 나는 간암 환자 카페며, 유튜브를 뒤져보며 서울의 큰 병원들을 알아봤다. 엄마가 전화로 병원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망연해했다. 나는 휴대폰을 붙잡고서 동시에 노트북으로 병원을 예약하고 있었다. 키보드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 교수님 예약 잡혔어! 서울 병원에서 MRI 한번 더 찍어보자."
"아이고, 그래. 그래야 확실하지. 네가 잘 알아봐 주니까 마음이 놓인다. 아빠도 고맙대."
나는 암환자의 보호자다. 이제 아버지의 보호자다. 엄마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한 건, 그만큼 나를 믿어서다. 더는 엄마의 뜻을 곡해해선 안 됐다. 그건 가족 모두에게 해가 될 어리광이다. 엄마에게 의지가 될 수 있어서, 아버지에겐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참 다행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무너지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