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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이 Jul 07. 2023

양상추

의지에 관하여

'이번엔 꼭 다 먹을 거야.'


양상추를 살 때, 내 의지는 언제나 굳세다. 크고 싱싱한 양상추는 생각지도 못한 결심을 하게 만든다. 1990원, 심지어 값까지 싸다니. 누구든 사지 않곤 못 배길 것 같은, 욕망 덩어리 그 자체다. 사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양상추를 야심 차게 덥석 집어 들고 와서는 얼마간 눈길도, 손길도 주지 않고 훌쩍 내다 버린 일 말이다. 전력을 무시하고선 과오를 반복한다. 알면서도 저지른다, 이번만은 내 의지가 이전과 다르다는 듯이. 


냉장고 안에 양상추를 모셔둔지 어느덧 3일 차. 아직 죽지 않았구나, 하고는 냉장고 문을 세차게 닫는다. 꺼내기-씻기-떼어내기-자르기-닦기-차리기...얼추 생각해도 저 양상추를 처리하려면 대여섯 단계의 일을 해야 하니까. 언젠가는 할 거야,라는 막연한 자기 확신으로 나태한 본색을 덮어버린다. 그렇게 양상추는 죽어간다. 


일주일이 되던 참이다. 양상추를 손질해 두면 아무래도 먹는 데 수월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손길이 갔다. 무언가를 해 먹을 수 있도록 양상추를 손질한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고는 다시 양상추를 냉장고 속으로 보내버렸다. 나는 절반의 성공에 만족했다. 다음 단계가 있음을 알면서도 나아가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양상추가 깊은 잠에 든 지 열흘째다. 죽었다, 마침내. 물기를 다 없애고 보관했다 생각했는데, 비닐백 속에서 흥건한 채로 흐물해져버렸다. 눈물을 짜내 녹초가 된 듯한 형체가 더는 손 쓸 수도 없다고 나를 말렸다. 


실컷 양상추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이건 '의지'에 관한 글이다. 요즘 나는 별 의지 없이 산다. 양상추를 탐해서 들여놓고는 결국 내다 버렸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도 내 안에 크게 들었다가 금세 쪼그라들어 버린다. 도통 내 마음을 알 수 없는 나날인데, 의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은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애초에 양상추를 사지 않았으면 된다. 또 이렇게 생각하자니, 그럼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양상추 한 통 버린 일쯤은 자책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히피이모'가 이런 말을 했다. "넘어질 때 넘어지더라도 하나는 배우고 일어나야 합니데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낸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대단한 걸 쉽게 해낼 수 없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요동치는 인간의 의지에 나까지 흔들릴 필요가 없단 거다.     


양상추를 핑계 삼아 이렇게 내 속내를 털어냈으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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