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100% 즐겨봤다면 어쩌면 쉬운 질문
미국 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첫 번째, 7개월 그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놀고 즐겨라. 그리고 두 번째는,
좋아하는 게 뭐야? 여기서 하고 싶은 게 뭐야? 였다.
사실 두 가지 말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들이라, 처음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며 넘어갔었다.
나는 단순히 방문 연구원으로 왔기에, 한국에서의 내 연구를 전부 스탑하고 온 만큼 그 이상의 성과를 내야겠다는 압박이 전부였다. 더욱이 여기에 오기 직전까지 이 공동연구 주제 및 목표는 확정되지도 않았고, 큰 주제 틀마저 내가 하던 것이 아닌 연구실 선배 연구의 연장선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선배는 이 연구 가설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었다.
처음 해외 장기 파견연구자로 교수님의 선택을 받았을 때는 다양한 경험을 너무 좋아했던지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로 승낙했었다. 하지만 점점 연차가 쌓이고 실제 논문 성과가 없다는 것에 초조함이 감겼고, 이제 내 연구에서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곳에 오게 되어 정신적으로 굉장히 예민했었다. 연구 생각으로만 뒤덮였던 그런 나에게 이런 질문들은 정말이지 당황 그 자체였다.
당황했던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이곳에 놀러 온 게 아닌데 왜 놀라고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서였다. 어쩌면 이건 약간의 황당도 섞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던 진짜 이유는 정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답을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한국에서 이런 질문을 안 들어본 게 아닐 텐데도 너무나도 낯설었고, 그마저도 대답한 피아노 연주와 사진 찍기는 좋아하는 일이 맞지만 입 밖으로 나가는 그 단어들이 어색했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왜 나는 당당히 대답을 하지 못했는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 없거나 몰라서일까? 그렇다기엔 피아노와 사진은 진짜 좋아하는 일이긴 했다.
내가 원할 때 연주하고 싶어서 큰맘 먹고 키보드를 샀고 가끔씩 feel이 꽂힐 때 폭발적으로 나오는 즉흥연주는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하는 나를 만들었다. 사진은 말하기 입 아플 정도로 최근에 발굴 성공한 새로운 취미였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할 정도니 말 다했다 볼 수 있다.
실제론 한국에선 정말 당당하게 이 두 가지를 내 취미라고 말하고 다녔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나 자신에게 자부심도 있었는데, 왜 갑자기 여기서 이 질문이 날 당황시킨 걸까?
그 해답은 이곳에서의 삶이 적응이 될 때쯤 살며시 피어났다. 바로 순수한 즐김의 부재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좋아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그것들을 할 때, 나는 100% 그것을 '즐기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피아노를 칠 때도, 여행 가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머릿속 한편에서 계속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내가 그랬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뜻하지 않게 이곳의 생활이 그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대학 입학 후 연구자의 길을 걷겠다는 꿈을 위해, 그 꿈에 관련된 모든 것을 쉬지 않고 계속했었다. 중간중간 번아웃으로 일시정지 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쉼(하고 싶은 일 하기)을 통해 재정비하여 다시 출발했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지금까지의 쉼은 제대로 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을 준 건 이곳에서의 생활 패턴 덕분이었다. 정말 '연구하러' 이곳에 왔기 때문에, 연구만 뺀다면 나머지 시간은 순수하게 '비어있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lab safety training, 실험 set up(물품 주문 등)으로 거의 첫 달은 연구하는 시간도 빠지게 되어 말 그대로 24시간이 자유였다.
이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에 나에게 그러한 질문을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말하면서도 무슨 남의 취미를 말하는 것처럼 당당하지 못했고(?) 어색했다. 어쩌면 그 어색은 당연했다. 항상 내 머릿속을 차지하던 일의 비중이 없어졌으니, 그 빈 곳의 괴리감을 느꼈던 것이다. 숫자로 예시를 든다면, 평소 좋아하는 행동을 할 때, 80%는 좋아하는 일을, 나머지 20%는 일을 생각했다고 치자. 그런데 20% 영역이 반강제적으로 없어졌으니,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이 80% 밖에 없다고 느끼면서 확신이 무너졌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좋아하는 일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해소 도구'로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업무로 지친 뒤에 그것을 풀고자 좋아하는 걸 했어도, 아무런 이유 없이 평상시에 시간 내어 좋아하는 것을 순수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좋아한다라는 대답에 100%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행동의 근본이자 어쩌면 목적이었던 '일'이 빠졌으니 말이다.
이 생각이 들었을 때, 처음엔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 알았고, 그 사랑이 건강하게 이어가려면 일과 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신호로 다가왔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 본인이 엄청난 워커홀릭이라면, 한 번쯤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으면 한다. 물론 좋아하는 것이 내 업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이 일이 되는 순간 온전히 즐길 수는 없다. 취미(좋아서, 즐기기 위해 하는 것)와 일은 엄연히 다른 것. 과연 100% 즐기는 것이 있는지, 만약 당당히 답변하기 어렵다면 어쩌면 그대도 균형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진: Balboa park, San Diego, 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