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덕후가 되었다.
무언가에 미쳐 살아본 적이 있는가?
10대 시절 가장 자랑스러웠던 나의 모습 중 하나는 바로 덕질을 해봤다는 것이다. 덕질의 긍정적 효과를 성인이 되고 난 이후까지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덕질의 시작
나의 덕질의 시작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빠진 애니메이션부터 시작된다. 당시 우리 반에는 3D 덕질파와 2D 덕질파로 나뉘었었는데 나는 후자였다. 3D의 잘생김보다는 2D의 잘생김이 더 다가왔던 그런 시기였다. 운 좋게도 나와 똑같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사귀게 되면서 제대로 덕질을 시작했다. 그 친구와 만나면 항상 만화 이야기를 했고, 일본어 공부도 조금씩 하기도 했다. 뜻도 모르는 일본어 OST도 외우고, 몇 가지 기본적인 단어도 숙지하게 되었다. 모작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만화를 좋아하다 보니 덕질하는 애니메이션 외 다른 만화도 다양하게 섭렵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와 함께 만화책방에 가서 100원 주고 만화책을 빌려오는 것이 낙이었으니 말이다. 만화책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면 연체도 많이 되어서 만화책방에 연체료(500원)를 몇 번이나 냈는지 모른다. 하루에 6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것, 종이만 보면 낙서를 하는 것은 어느새 내 일상이 되어있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께선 내가 그림에 푹 빠져 있는 시간을 존중해 주셨고, 덕분에 정말 많은 그림을 그려냈던 초등학교 시절이다.
그 애니메이션에 푹 빠진 채로 중학생이 되었고, 결국 난 만화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화부 활동을 하던 시절이 10대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 같다. 나랑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축제 준비를 위해 동그랗게 바닥에 엎드린 채 커다란 전지 위에 각기 다른 그림체의 캐릭터를 그려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다. 축제 포스터도 그려보고, 함께 클럽활동 시간에 좋아하는 만화를 시청하며 덕질 활동도 하고.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자극도 받고 그림 연습도 더 열심히 하기도 하였다. 그 시절엔 한 달 용돈을 아껴뒀다가 매 달 말에 발간되는 만화잡지 <밍크>를 사 모으는 것이 한 달 중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밍크>가 나오는 날은 친구들과 하교하자마자 문구점으로 달려갔다. 밍크를 집에 모셔오는 날은 하루종일 <밍크>에 빠져 살았다. 여러 다른 만화도 읽고, 각기 다른 작가님들의 그림체를 보고 따라 그려보고, 연구하다 보면 하루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무언가에 빠져드는 시기가 되면 마음이 정말 말랑말랑 해지나 보다. 그 어느 때보다 쉽게 덕질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던 그 시기에 애니메이션과 동시에 영어 콘텐츠에 푹 빠져있기도 했다. 특히나 정말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디즈니 영화들 그리고 <해리포터>와 <셜록홈즈>는 날 미치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TV도 늘 Onstyle 채널에서 방영하던 <도전, 슈퍼모델> 같은 미국 프로그램을 시청했고, 점점 해외생활과 영어공부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다. 다 알아듣고 싶고, 저렇게 유창하게 말하고 싶고, 저런 멋진 발음을 가지고 싶었다. 엄청난 열정과 갈망은 영어를 공부가 아닌 놀이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영어 자료를 찾아보고 학습을 하던 그 시절의 나였다. 이 시기 빠져있었던 <해리포터>는 아직까지도 매 년 최소 한 번씩 꼭 챙겨보는 시리즈다. 대학생 때는 과제를 할 때, 혼자 밥을 먹을 때마다 백색소음처럼 틀어놓곤 했다. 요즘은 그림작업을 할 때마다 해리포터를 라디오처럼 켜두며 살고 있다. 살며 해리포터를 몇 번이나 돌려봤냐 물어본다면.. 아마 정말 100번은 될 것이라 답할 것 같다. <트와일라잇>에 빠져있었을 때엔 해당 영화를 20번 넘게 시청하여 대사를 다 외우기도 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1,2,3권을 다 읽고 난 뒤엔 마지막 편인 4번째 책의 번역본을 기다리기는 시간이 너무 괴로워, 원서를 구입해 이틀 내에 다 읽어버리기도 했다. 10대에만 가질 수 있는 빠른 습득력에 '열정'이라는 부스터가 더해져 영어 실력은 자연스럽게 향상되었다. 지금까지도 이때 쌓은 영어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아, 떠나가버린 열정이여
고등학생이 된 이후부터, 즉 덕질 시기가 끝난 이후부터는 영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수능공부를 하면서부터 '영어 = 공부'가 되어 이젠 영어책을 펼치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시기의 내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워진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은 동일한데 다가가는 마음가짐이 너무나도 다르니 그 효율은 배 이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특히나 성인이 된 이후 이 시절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무언가에 미쳐 자연스레 실력이 쌓이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을 덕질 시기가 사라진 이후부터 뼈저리게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 시절에 대한 갈증 또한 강해졌다. 이렇게 툭 끊어져 사라져 버릴 줄 알았다면.. 고등학교 시절에 적당한 덕질은 유지해 볼걸.. (가능했을지는 모르겠지만...ㅎ) 너무 덕질과의 연을 단번에 끊어버리고 수험생활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대학생이 되고, 취준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도 무언가에 흠뻑 빠지는 마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인지, 너무 매사가 지치고 힘들어서인지 그런 즐겁고 행복했던 마음은 쉽사리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성인이 된 이후, 그림이든 영어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려고 해도 그때만큼의 부스터 효과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영어와 그림을 좋아한다는 마음은 동일한데, 그 마음과는 별개로 이들을 대하는 내 태도는 '재미있어서'가 아닌, '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번 덕질을 해봤기 때문에 더욱더 그때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비교되어 적응이 힘들었다. 그저 좋아해서 푹 빠져버린 채로 하는 것에 대한 파워를, 그 효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그때와 상반되는 현재의 내 모습을 마주하기 싫었다.
좋아하던 그림도 영어도 흥미를 잃게 되며 정말 오랜 기간 손을 놨던 것 같다. 성인이 된 이후 영어는 토익이나 토플을 위해 공부를 해봤지 그 외에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방황을 했었다.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사라져 버린 현상은 꽤나 큰 공허함을 주었다. 무엇을 해야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 흠뻑 빠질 수 있을지 찾기 위해 오랜 기간 방황했다. 그리고 오랜 방황 끝, 미국에 오기 직전, 마음이 뛰는 것을 찾게 되었다. 정말 우연이었다. 오랫동안 날 지켜봤던 남편의 권유로 시작하게 된 하나의 배움이 지금은 나의 꿈이 되어버렸다. 신기하게도 그 꿈은 다시 그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꿈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후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예상한 것보다 꿈을 이루기 위한 기간이 길어지며 그때의 그 열정은 스멀스멀 사그라들었다.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던, 나아가는 모든 순간이 처음이었던 나의 꿈은 수십 번의 좌절감과 비참함과 답답함 그리고 압도감의 파도를 쳐대며 나를 공격했다. 계속되는 파도에 자신감이 정말 정말 많이 깎여버렸다. 아마 4월에 무기력했던 이유도 그런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며 생긴 현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시 돌아온 반가운 손님
다행히 (저번에 올렸던 글에서 언급했듯이) 충분한 쉼은 이런 무기력감을 사그라들게 했다. 쉬는 동안 초등학생 때 덕질했던 애니메이션도 다시 찾아봤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전 그때 그 느낌이었다. 진심으로 기뻤다.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만화를 다시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심지어 보면 볼수록 더 좋아지기까지 했다. 그 시절, 어렸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스토리의 촘촘한 짜임과 인과관계, 캐릭터의 서사들이 눈에 읽히며 더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다시 정주행을 하면서 어린 시절 나의 안목이 꽤나 높았음을 깨닫고 뿌듯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심지어 남편까지 끌어들여 매일 밤 함께 그 애니메이션을 보며 행복한 덕질생활을 하고 있다.
이 시기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 이 시기에 노를 저으면 훨씬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반가운 마음이 듦과 동시에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자'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아이패드를 켜고 프로크리에이트를 연 뒤 미뤄왔던 그림 연습을 시작했다. 한 동안 그림을 대하는 마음이 괴로웠는데, 덕후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자 이젠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모작하면서 서서히 그림에 대한 열정이 살아났다. 초등학생 때 덕질하며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던 때처럼 마음이 콩닥대며 그림이 재밌어졌다. 핀터레스트에서 모작하고픈 자료를 모으면서 점점 인체를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고, 나도 모르게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그때 그랬던 것처럼 뚜렷하게 그려졌다. 인체공부, 해부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아.. 이런 미친 듯이 파고들어 가는 감각, 의도하지 않아도 해야 할 것들이 그려지는 이 감각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오래간만에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내 모습을 보면서 덕질의 파워를 다시금 느끼며 행복하고 감사하게 지내고 있다.
어떤 것에 미쳐서 엄청나게 빠져버릴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자긍심을 느낀다. 좋아하는 것을 미친 듯이 파고들며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경험을 해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한 실력 향상의 부스트 효과를 톡톡히 누려봤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주는 어떤 주제로 글을 쓸까 많은 고민을 했다. 여러 가지 주제를 빈 공책에 적어 내려가다 '덕후의 파워'라고 쓴 키워드가 유난히 끌렸다. 최근에 찾아온 이 반가운 현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반가운 현상태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한 마음을 글로 꾹꾹 눌러 담고 싶었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이 반가운 설렘이 오랫동안 유지되길. 그리고 더불어 그때처럼 영어 관련된 덕질도 다시 시작할 수 있길..(영어공부 해야 하는데.. 너무 하기 싫다) 바라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