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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기자 Jul 01. 2020

나눔의 집 이야기

#1. 불편한 첫 만남

5월 19일 화요일 오전 9시 51분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거기 좀 다녀와야겠다, 광주."


'나눔의 집 후원금 횡령 의혹'취재는 그렇게 시작됐다.

앞서 MBC 'PD 수첩'에서 나눔의 집 문제를 다뤘고 몇몇 신문 매체들에서 나눔의 집 운영진의 후원금 횡령 의혹 보도가 이어졌기에, 나는 말 그대로 '총'을 맞고 완벽한 후발주자로 경기도 광주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하…XX, 하필 오늘같이 비 오는 날 광주라니."


광주는 멀었다. 문자 그대로 멀었다. 심지어 비까지 오니 가는 차 안에서도 여러 선배들로부터 여러 지시를 받고 일처리를 다 하고도 남을 만큼 멀었다. 도착해서 내릴 땐 허리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점심도 거른 채 상황 파악을 시작했다. 나눔의 집은 주차장 앞에 역사관이 있고, 인포데스크가 있는 작은 사무실 건물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시는 본관 건물,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구성돼있었다. 여기서 역사관과 박물관은 내 관심사안이 아니었다. 일단 패스. 들어가기 쉬어 보이는 인포데스크 건물로 먼저 들어갔다. 안경을 쓴 여성이 내부 책상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나눔의 집에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법인과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꽤 중립적인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저도 여기 오고 나서 놀랐어요. 문제가 많더라고요."


취재원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은 유리한 입지를 만들 수 있다. 내부의 문제를 가감 없이 내보임으로써 자신의 신뢰도를 높이고 합리적인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 나 역시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법인과장의 말을 요약하면 이랬다. 나눔의 집 문제에 대해 내부 고발을 한 직원들이 외부인의 건물 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그 안에 있는 조리사와 요양보호사 등을 감금하고 있다는 것. 법인과장인 자신조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 문제가 있다면 함께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될 판에, 고발 직원들은 인포데스크에 있던 전 사무국장 컴퓨터며 금고까지 뜯어가서는 꽁꽁 싸매고 보여주질 않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


이게 사실이라면 이 자체로 기사가 될 만하다고 느꼈다. '나눔의 집 내부고발 직원들 시설 점거… 운영 마비', 얼마나 그럴 듯 한가. 하지만 아직 한쪽 말밖에 듣지 못했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본관 건물로 향했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소리쳐서 불러봐도 반응이 없었다. 분명 안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는데, 내 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내가 헛것을 봤나, 저 사람들은 유령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 유령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쪽에서는 시설 점거를 주장하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취재기자를 무시한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법인과장의 말이 진짜인 건가.


본관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 봤다. 2층 뒷문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있었고 창문에 직원 몇 명이 보였다. 그들은 나와 우리 쪽 카메라를 보자마자 이불로 창문을 가렸다. 철저한 봉쇄. 수상한 움직인.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진짜 이런다고?


20분 정도 지났을까, 창문이 조금 열리며 중년 여성 두 명이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기자예요?"

"네."

"잠시 이 쪽으로 와보세요."


그들은 뒷문을 열어주더니 내게 빠르게 속삭였다.


"우리가 지금 CCTV로 감시당하고 있어서 말을 많이 못 해요. 명함 주시면 전화할게요."

"왜 감시를 해요?"

"자기들 입맛에 맞게 내부 고발이니 제보니 해놓고 말 새 나가지 않게 하려는 거겠죠. 근데 할머니들 옆에 하루 종일 붙어있는 건 우리들인데, 우리말이 더 믿을만하지 않겠어요?"


뒷문이 닫히고, 멍해진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법인과장이야 고발 대상인 법인 측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할머니들 옆에 있는 조리사와 요양보호사까지 이런 말을 하니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MBC에 나온 얘기는 뭐지? 지금 뭔가 숨겨져 있는 건가? 더더욱 내부고발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그로부터 한동안을 직원들과 접촉하려고 시도했다. 여전히 나는 일방적으로 무시당했다. 이미 내가 도착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내가 여기 온 최초의 목적은 후원금 횡령 의혹. 내부고발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저히 진행할 수 없는 주제였는데, 거기에 더해 상황이 오묘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쓸 기사의 제목이 바뀌어야 할 상황. 선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선배, 지금 내부고발 직원들이 시설을 점거하고 있다는데요."

"그게 뭐. 후원금 횡령 자료는 입수했어?"

"아뇨. 지금 내부고발 직원들을 만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후원금 횡령이 오늘 '야마'* 아니야?"

"그렇긴 한데, 지금 상황이…"

"야, 됐고, 현장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일단 그냥 빠져. 복귀해."


*야마 : 기사의 제목, 주제


'후… 그래… 돌아가자….'

선배 말이 틀린 건 없었다. 지금 이슈를 뜨겁게 달군 건 운영진들의 후원금 횡령 문제였고,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을 만나서 근거자료를 받지 못하면 이슈를 따라갈 수 없었다. 현장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도 맞았다. 돌아가서 늦은 점심이라도 챙겨 먹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 같았다. 그리고 뭐 솔직히 저 사람들이 점거를 하든 농성을 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데 내가 알게 뭐야.


당시의 현장을 함께 지켜보던 H매체 기자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타 서울로 향했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SOS'


섬뜩했다. 전화연결을 해보니 아까 뒷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같은 또 다른 요양보호사였다.


"기자님, 저 젊은것들이 돈에 눈이 멀어서 저러고 있는 거예요. 내부고발이니 뭐니, 다 거짓말이에요. 할머니들이 지금 얼마나 잘 살고 계시는데요. 속지 마세요. 진짜 지금 조리 사고 요양보호사고 다들 내부에서 감금돼서 CCTV로 감시당하고 있어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그 사람은 근거 사진을 문자로 보내왔다. 이불로 창문을 가린 사진. 우리가 아까 봤던 광경.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한 채 법인 측과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 혼란은 가중됐고, 이미 기사는 틀어졌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서울에 다다를 무렵,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광주로 다시 가라."


이유인즉슨, 아까 내가 인사하고 헤어졌던 H매체에서 다음과 같은 단독보도를 냈기 때문이었다.

'나눔의 집 고발 직원들 시설 점거… 수개월째 운영 마비'


하하하. 재밌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재밌었다.

일단 내가 보고를 먼저 했던 사안에 대해서 소위 '물 먹은 것'이 재밌었고, 저렇게 대놓고 '운영 마비'라고 쓸 만큼의 확신은 없던 현장이었던 것 같은데 저걸 [단독]을 붙여서 썼다는 게 재밌었다. 아, 한 가지 더. 서울에 다 와서 이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재밌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광주에서 출발하기 전에 점심이라도 먹을 걸.


먼 길 돌아 다시 온 나눔의 집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기자들이 와 있었다. 다들 그 단독보도 총을 맞고 달려온 기자들이었다. 난 우선 아까 만났던 H매체 기자부터 찾았다. [단독]까지 달고 썼을 때는 확신이 있었단 얘긴데, 난 아무리 봐도 찾을 수 없었던 확실한 근거를 어디서 찾은 건지 궁금했다.


"무슨 근거로 '수개월 째 운영 마비'라는 말을 쓰신 거예요?"

"아… 그게 제가 쓴 기사가 아니라 선배가 쓴 거라…."


어딜 가나 선배가 문제 구만.

법인 과장에게도 물었다.


"혹시 과장님이 '수개월 째 운영 마비됐다.'는 말씀하셨어요? 지금 나눔의 집이 운영이 마비된 상황인가요?"

"아뇨, 전 그런 말 안 했는데 왜 그렇게 보도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일단 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인 건 맞는데 운영이 마비됐다고까지 할 건 아닌 것 같고…."


오케이. 상황 접수.

그러니까 이 상황은 나눔의 집 법인 측과 직원 측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법인 측이 직원들의 '점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직원들은 대응을 안 하고 있는 것. 여기까지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고, '운영 마비'는 그냥 그 기사를 쓴 기자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다시 본관 건물로 향했다. 기자들이 몰리니 내부 직원들도 더 이상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나와서 대응을 하고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은 공통됐다.


"시설 점거하고 계신 건가요?", "외부인 출입 금지돼 있어요?", "수개월 째 운영 마비라는 게 사실이에요?", "할머니들은 제대로 보호받고 계신 거예요?", "지금 법인 측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세요?"…


대응에 나선 직원은 수세적으로 답했다.


"그거 오보예요. H매체에서도 수정하신다고 했어요. 저희가 무슨 점거를 해요. 운영 마비도 안 됐어요. 지금 사람들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럼 MBC 'PD 수첩'에 주셨던 자료들 저희도 주세요. 저희 후원금 횡령 의혹 취재하러 온 거예요."

"모든 자료는 김대월 선생님한테 있어요."

"그럼 그분 만나게 해 주세요. 저희가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시든지요."

"그건 안돼요. 지금은 못 만나시고, 들어오실 수도 없어요. 죄송합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 점거가 아니라면서 외부인 출입은 금지한다? 내부고발을 하겠다면서 고발 자료를 안 보여준다? MBC를 제외하고 다른 기자들은 안 만나준다?


그로부터 추가로 설득하고 따지고 물어보길 수 차례,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제는 기사를 써야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해명을 거절하면 더 이상 방법은 없었다. 앞서 단독을 달고 보도했던 H매체에서도 기사를 수정했고, 완벽하게 '점거'라는 말을 쓰기에는 애매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점거가 아니라고 말 하기도 애매했다. 직원들은 부인하지만 현장에서 파악하기론 직원들이 건물을 근거지로 두고 법인 측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해 보였다. 운영 마비는 없었지만, 법인 VS 직원 간 대치에 할머니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은 맞다고 판단했다.


결국 난 그날의 기사를 '사실상 점거'라고 썼다.

이게 나눔의 집과 나의 불편한 첫 만남이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449&aid=000019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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