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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기자 Jul 09. 2020

나눔의 집 이야기

#2. 드디어 만났다.

5월 21일 목요일 오전 10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점심은 광주에서 먹어라."


선배의 지시는 늘 이런 식이다.

뭔가 뜬금없고 당황스러운데 또 이게 매력이라,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선배가 띄워준 링크는 KBS 기사였다.

<'평화인권센터'짓는다고 모금하더니 땅만 사들인 '나눔의 집'>이라는 기사였는데 요약하자면 나눔의 집이 국제평화인권센터를 짓겠다고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67번지 땅과 68번지 땅을 사들였는데 그 부지가 지금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다시 후발주자로 광주를 가는 길이었지만 이 날의 나의 각오는 남달랐다.


'오늘은 기필코 만나고 만다.'


사실 지금 우리가 계속 연이어 후발주자로 뛸 수밖에 없었던 건 정작 내부고발 직원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뭔가 그 안에서 자료를 얻어야 기사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을 텐데, 이대로라면 나눔의 집 이슈에서는 영원히 휘둘리다 끝날 판이었다. 내가 애초에 맡지 않았으면 모를까, 일단 내가 뛰어든 바닥에서 남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건 질색이었다.


이전의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나눔의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점심부터 챙겨 먹었다. 이번에도 점심을 먹지 못하면 정말 너무 힘들어서 못 버틸 것 같았다. 나는 현장에서 버티는 힘은 정신력이고 그 정신력의 원천은 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쨌든 점심도 든든히 먹었겠다, 이제 정말 두꺼운 낯짝과 두터운 배짱으로 돌파할 일만 남았다.


'오늘은 기자들도 별로 없네. 딱 좋다.'


본관 건물로 곧장 가서 문을 두드렸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무시 당한다. 아무리 나긋나긋하게 인사하고 때로는 큰 소리로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 


건물 뒤로 돌아갔다. 사무실 창문이 보인다. 냅다 창문을 두드렸다. 직원이 창문을 열고 누구냐고 묻는다.


"저 저번에 왔던 기잡니다. 기억하시죠?"

"네. 기억해요. 무슨 일이세요."

"아니 한 번만 만나 달라니까 왜 이렇게 안 만나 주세요?"

"저희더러 시설 점거한다고 써놓고서 어떻게 만나 달라고 하세요?"

"그건 실제로 저를 안 만나주셨고 외부인 차단돼있었고 아무런 대응을 안 하셨으니까 사실상 점거라고 쓴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면 제대로 만나주시고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죄송합니다."


드륵-탁!

창문이 짜증스럽게 닫히고, 난 건물 뒤 편에서 처량하게 서 있었다.


'아... 오늘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로부터 건물 뒤편에서 창문을 두드리고 건물 앞편에서 문을 두드리며 건물을 두어 바퀴 더 돌았을까, 누군가 본관 건물 문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순간, 촉이랄까, 직감이랄까, 같은 말인가, 아무튼 그런 게 '찡-'하고 울리는 게 느껴졌다.


'아, 저 사람이 김대월인가 보다.'


김대월. MBC PD 수첩에서 인터뷰를 했고 전에 한 직원이 "모든 자료는 김대월 선생님이 가지고 계세요."라고 했던, 사실상 내부고발 직원들의 대표 격인 사람. 이 사람을 만나야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김대월 선생님이시죠? 저 인터뷰 한 번 해주시죠."


그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전화통화에 집중하며 날 지나쳤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는 명함을 들이밀었다. 그는 날 힐끗 보더니 명함을 받아 들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뭔가 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이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또다시 기다림이 이어졌다.

문을 두드리고, 건물 뒤를 돌아 창문을 두드리고… 결국 지쳐서 주차장에 세워 둔 회사 차에 가서 좀 쉬려고 할 즈음, 또 다른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준아 김대월 씨가 만나준대!"


알고 보니 내가 김대월 씨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사무실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한 놈은 밖에서 만나 달라고 문 두드리지, 또 한 놈은 계속 전화로 만나 달라고 하지. 도저히 안 만나고는 못 견디겠다 싶었던 걸까, 드디어 그렇게 만나기 어려웠던 김대월 씨를 그렇게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는 소중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한 번 할 때 잘해야 했다.

준비한 질문들을 경건하게 손에 들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보통 인터뷰를 할 때는 영상 편집을 생각해서 목소리가 겹치지 않게 인터뷰이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흐름이 헷갈리지 않도록 다른 이야기를 중간에 넣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은 부족하고 물어볼 말과 요청할 자료가 많을 때는 예외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아, 그 자료는 좀 주세요."라거나 "오, 그 자료도 주세요."라는 말을 중간중간 넣으며 인터뷰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월 씨는 인터뷰 내내 첫마디를 "할머니"로 시작했다.


"할머니께서 침대에서 떨어지셨던 일이 있었는데요…."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할머니께서 어딜 가셨을 때의 일인데요…."


내가 느낀 김대월 씨는 '내부 고발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짊어질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정말 할머니들을 사랑했던 순박한 청년의 느낌이었다. 할머니들께 마땅히 돌아갔어야 할 후원금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고, 할머니께서 침대에서 떨어져 다치셨는데 응급실도 못 가게 하고 그 낡은 침대를 새로 사지도 못하게 하는 운영진에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진심을 봤다.


자신의 진심을 본 나의 진심을 그도 본 것일까.

더이상 나는 나눔의 집 이슈에 있어서 후발주자가 아닐 수 있게 됐고, 나눔의 집 문제에 좀 더 본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유재석 후원금’ 들어간 인권센터 부지…주차장 전락 : 네이버 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449&aid=000019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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