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반론
5월 22일 수요일 오전 7시
"오늘 몇 시에 가기로 했냐"
이젠 아침에 선배 전화를 안 받으면 어딘가 허전하다.
오늘 나눔의 집에 가는 것은 어제부터 예정돼 있었다. 이번 주에만 세 번째 나눔의 집에 방문하게 됐지만 오늘은 이전과는 기분이 달랐다. 어제 김대월 씨로부터 받은 자료를 검토한 결과 두 가지 주요 쟁점을 찾아냈기 때문. 이제 더 이상 후발주자가 아니다.
두 사안은 모두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첫 번째는 안 소장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게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며 막말을 하고 사람들이 할머니께 드린 돈을 자신이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안 소장이 모 교수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변호사 선임비용을 후원금으로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안 모두 안 소장의 반론을 듣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김대월 씨가 아니라 안 소장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나눔의 집에 일찍 도착해서 인포데스크 사무실에 들어가니 첫날 만났던 법인과장과 새로운 사무국장이 앉아있다. 사무국장이 나온다.
"무슨 일이세요?"
"소장님 계시나요?"
"아뇨. 외근 가셨는데요."
"언제쯤 오실까요?"
"글쎄요. 오후는 돼봐야 알 것 같습니다."
쉽게 얼굴을 볼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래, 뭐 아직 시간 있으니 밥이나 우선 먹자…'
나눔의 집을 자주 방문하면서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밥 먹는 일이었다. 나눔의 집 주변에는 산과 밭밖에 없어서 차를 타고 나가야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첫날에는 상황을 몰랐던 탓에 아예 밥을 먹지 못했고, 두 번째는 경험상 취재를 시작하기 전에 먹어두었다. 그때 갔던 돌 짜장 집이 있었는데, 태어나서 '돌 짜장'이라는 건 처음 봤지만 그 근방에서는 가장 먹을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돌 짜장 집으로 향했다.
돌 짜장을 먹으면서도 신경은 계속 나눔의 집 내부 상황에 가 있었다. 소장은 언제 올지, 소장을 만나면 어떻게 질문을 던질지, 해명은 어떤 식으로 반영하는 것이 적절할지 등등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치우고 다시 나눔의 집으로 와보니, 마침 소장과 사무국장·법인과장 등도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지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어떤 스님이 서 계셨다.
"소장님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그때 옆에 있던 사무국장이 말을 거든다.
"아, 아까 오전에 오셨던 기자님이신데, 소장님 계속 기다리셨습니다."
"아, 그래요."
보통 "아, 그래요." 하면 다음 말은 "들어가시죠."라든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라든지, 뭔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나? 소장은 "아, 그래요." 하더니 그냥 휙 들어가 버렸다.
사무국장 역시 당황하기도 하고 나에게 좀 민망했는지 나를 다독이면서 말했다.
"소장님께서 스님이랑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그런 것 같아요. 기자님,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았다. 기자라면 급할 땐 누구보다 빨리 움직여야 하기도 하지만 기다려야 할 땐 또 망부석처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그건 괜찮은데, 사무국장의 말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맞는 건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과연 사무국장이 소장을 설득할 수 있을까?
시간이 더 흐르고, 슬쩍슬쩍 '나 밖에서 아직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걸 티 내려고 어슬렁어슬렁 사무실 주위를 맴돌기도 삼십 분 정도 됐을까. 사무국장이 내가 안쓰러웠는지 다시 한번 나온다.
"기자님. 제가 소장님께 말씀드렸어요. 기자님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잘 써주시는 분이라고. 뭔가 다른 기자님들과는 좀 다른 분인 것 같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으니까, 어디 다른 데 가셔서 편하게 기다리세요. 여기 계속 계시니까 죄송해서요."
"아, 아뇨. 전 괜찮습니다. 여기서 계속 기다릴게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사무국장은 내가 얼마나 귀찮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랬을까.
'으 지독한 놈' 뭐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별 수 있나. 내가 여기서 자리를 떠버리면 저 사람들은 그냥 날 잊어버릴 텐데. 원래 취재원이 누가 됐든 연락 주겠다고 해놓고 연락 못 받는 건 일상다반사다.
그로부터 삼십 분이 더 지났을까.
김대월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자님! 지금 소장이 회계담당자 업무를 나누려고 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같이 들어간 스님이 00 스님인데 그분이 이사진이거든요. 근데 법인 회계담당 직원이 있는데 이 업무를 새로운 법인과장이랑 나누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저 사무실에서 그런 대화가 오가고 있는 거예요?"
"네."
사실이라면 기록해놔야 했다. 주장의 대립은 둘째 치고, 일단 이사진과 소장 간의 밀실대화로 멀쩡한 직원의 업무가 강제로 나눠지는 상황은 분명 이상한 일이니까. 게다가 지금처럼 후원금 횡령 의혹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선배한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결연하게 말했다.
"카메라 들이밀겠습니다. 안 소장 반론도 받을게요."
"… 그래, 해봐."
내게 친절하게 해 주려 애썼던 사무국장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정 다 봐주다가 중요한 장면 다 놓치게 생겼다. 카메라 기자 선배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이크를 들고, 곧장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내부에선 일동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난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회계담당 직원의 업무를 왜 나누시려고 하는 겁니까?"
00 스님은 차분한 어조로 해명했다.
"원래 시설과 법인이 나누게 돼 있습니다. 그게 광주시 지적사항이었는데 지금까지 잘 안되던 걸 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에요."
그때 김대월 씨가 따라 들어와서 스님에게 따져 물었다.
"시설회계는 전 사무국장이 하게 돼있는데 제대로 안 했던 것이고, 법인회계담당 직원은 원래 정해져 있는데 그걸 두 사람이 나누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직원들이랑 상의도 없이 이렇게 하시는 게 어디 있어요."
"아니, 김 선생. 그게 아니죠. 원래 이 사항은…"
이런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사실 내게 더 중요한 건 오늘의 목표인 안 소장의 반론을 듣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으로 안 소장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새 안 소장이 보이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카메라 기자 선배에게 상황을 알리고 바로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안 소장은 이미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것인지, 현장을 피하려고 나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잡고 물어야 했다.
"소장님! 저 한 말씀만 여쭙겠습니다!"
"아, 저 할 말 없어요."
소장은 다시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소장의 걸음은 빨랐다. 나와 카메라 기자 선배는 그런 소장을 쫓아갔다.
"이옥선 할머니한테 막말하셨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아니에요. 내가 막말을 왜 해."
"뭐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이런 말…"
"아니에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럼 개인 소송의 변호사 비용을 후원금으로 처리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요?"
"그건 개인 소송이 아니고, 나눔의 집 관련된, 할머니 관련된 소송이에요."
"문제없다는 말씀이세요?"
"네네."
이 말을 끝으로 소장은 사무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나는 더 이상 소장을 좇을 수 없었다.
회계업무 분담 문제와 관련해서는 추가 취재가 필요해 보였다. 00 스님의 말이 맞는지, 김대월 씨의 말이 맞는지 아직은 판단이 어려웠다.
그렇게, 나눔의 집에 세 번째 찾아온 끝에, 단독기사 두 개가 탄생했다.
[단독]이옥선 할머니 “막말한 나눔의 집 소장 괘씸해” : 네이버 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449&aid=0000192136
[단독]나눔의 집 소장, 후원금으로 변호사 비용 충당 : 네이버 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449&aid=0000192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