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의 집, 확장되는 세계
예술가는 그 얘길 남겨서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 지 몰라도. 평범한 사람에게, 조제처럼 아픈 사람에겐? 그저 지나간 강렬한 사랑이 뭘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쩌면 내 이런 물음은 아픈 사람이, 남겨진 사람이 피해자로만 남을 거라고 봤던 편견에서 기인한 걸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이 물음에 공간으로 답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조제의 집을 꾸미는 데 공들였다고 했다. 영석을 만나면서 집은 변한다. 영석은 복지과 사람들을 불러 부엌과 마루를 더 편하게 만들어준다. 조제는 할머니가 주워오는 책을 보곤 했는데, 영석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사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조제의 집엔 주워오는 물건 말고 사오는 물건도 생긴다.
영석이 오기 전 조제의 집도 멋졌다. 조제는 할머니가 주워오는 빈 병들 사이에 자신의 좋아하는 위스키병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입에 거짓말을 달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여러 종류의 책을 훔쳐 읽었다. 거짓말은 아무나 하나. 뭘 좀 아는 사람이니까 척이라도 할 수 있는 거지. 영화에서 영석의 교수가 하는 척과, 조제가 하는 척이 비슷하게 묘사된다. ‘바디감이 좋다’는 표현으로.
영석의 집은 나오지 않는다. 영석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교수의 집, 자길 좋다고 하는 여자 후배의 고시원 등을 전전한다. 말로는 원룸 어디에 산다는데 어딘지 나오질 않는다. 나중엔 영석이 조제의 집에 와서 함께 산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조제의 집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떠난 건 영석이긴 하지만 조제의 집은 영석이 떠나든 말든 관심이 없다.
하룻밤 자려고 이리저리 자고 다니는 영석같은 애가(ㅋㅋㅋ), 조제같이 자기 공간을 묵직하게 차지하고 찾는 앨 어떻게 감당하겠어. 조제는 어릴 적 보육원에서 악질같은 원장의 밥에 락스를 타고, 그리곤 도망쳐나온다. 모두들 다리가 없는 애가 어떻게 도망치나 했다. 조제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할머니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조제의 집을 가꾼다. 요리 도구도 손에 딱 맞게끔 맞춰둔다.
조제는 영석으로 본인의 세계를 넓힌다. 첫 장면 나레이션에서 조제는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어. 나는 모든 곳을 여행해봤어’라는 거짓말로 나레이션을 시작한다. 영석과 헤어진 후 바뀐 화면에서 조제는, 영석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좀 재밌었던 건 영석이 구글 맵으로 그곳을 다 보여줬었는데, 카메라도 구글 맵처럼 휙~휙~ 이동하는 방식으로 연출했다는 점이다.
일본판은 한계를 겪고 떠나는 사랑에 방점이 찍혀있는 반면, 한국판은 ‘그럼에도 살아가는 조제’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제는 손으로 차도 운전할 수 있게 된다. 보육원 친구가 차를 고쳐준다. 복지과 사람의 친절 섞인 말을 받는 것도 익숙해진다. 그렇게 조제는 묵묵하게 자기 삶을 살아간다. 조금 더 나아진 그 집에서, 원하는 상상을 하면서.
‘조제의 집이 바뀌었구나!!!’ 는 머리를 띵하게 하는 깨달음이었다.
내 경험에 빌어봐도 첫 연인과 헤어졌을 때 집이 하릴 없이 허물어졌다. 시간이 지나고 더 좋은 비료를 뿌려서 더 좋은 집을 지었다. 좋은 물건은 남기고, 별로인 건 버리면서. 그 이후에 내 맘을 아프게 했던 수많은 인간을 토대로 지금 욜라 안락한 내 공간을 만들었다. 조제처럼.
마음 안에서 긋는 선, 내가 가진 상식의 기준, 나를 편리하게 해주는 물건, 인생을 낫게 하는 삶의 지혜와 같은 방식으로 남아있다. 이곳에서 나는 좀 더 편하게 숨쉬고 있다.
운이 좋게 거듭할수록 좀 더 괜찮은 만남을 했고, 좀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
조제한테도 영석은 겪어낼만한 이야기였고, 몸 뉠 곳을 더 편하게 해준 사람이었을 것 같다. 조제는 그렇게 해석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필요없는 병을 버리고, 위스키 병은 전시해뒀듯이. 조제는 영석과 함께 마신 위스키만 기억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