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수리_다음 퀘스트는 무엇일까?
사실 나도 알고 보면 공주인데 언제부터인가 힘센 머슴이 되어 있다. 7월 초부터 안방 화장실 변기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루에 좌변기에 앉는 횟수는 미미하나 고양이가 문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는 감자와 맛동산이 간혹 변기를 막곤 해서 또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뚫어뻥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변기를 며칠 동안 사용하지 못하기도 했고 고양이 감자와 맛동산은 쓰레기봉투에 넣어 처리했다. 그렇게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분명 변기는 물이 찼지만 변기 안에는 물이 차지 않아 의문감이 들었다. 남자들만 사용하는 공용화장실 변기 물뚜껑을 열어 탐색했다. 별반 다른 것은 없었다. 다만 변기 안에 물이 차오른다는 것뿐이었다. 난감해하는 내게 여동생은 업체를 부르던지 플라스틱 콜라병으로 뚫어보라는 조언을 했다. 처음엔 효과가 있었으나 두 번째 물 내림은 또 같은 증상이었다. 잠정적으로 안방 화장실 변기는 폐쇄되었다.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가 컸는지 아픈 배를 부여잡고 꾸역꾸역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회사 화장실에서도 변기 물통을 열어 어떻게 물이 차는지 관찰했다. 원리는 비슷했다. 레버를 누르고 물이 빠져나가고 다시 물이 차올랐다. 작고 가느다란 호스스로 물이 나와 관을 통해 들어가고 그 과정을 통해 변기 속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헬스장에 가서도 화장실에 들러 물뚜껑을 열고 관찰했다. 부속품의 모양은 약간씩 다르지만 원리는 같았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씻지도 않고 공용화장실로 가 변기물통 뚜껑을 또 열었다. 마찬가지였다. 변기 속 물이 차오르는 원리는 가느다란 관속에서 나온 물이 원통 속으로 흘러 들어가 변기 속 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안방화장실도 똑같았다. 다만 변기 속 물이 차오르지 않는 것이 다를 뿐. 그렇게 또 며칠간의 탐색의 시간이 흘렀다. 집에 사는 남자 3명과 수컷 고양이는 나의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늘 살던 대로 살 뿐이었다. 그렇다고 남자들만 쓰는 화장실을 쓰기도 싫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절제와 인내를 총 동원했다.
어느 날 저녁 이렇게는 못살겠다는 생각에 운동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진지하게 네이버 오빠에게 물어봤다. '변기물이 안 고여요!'
그러자 나보다 먼저 이런 질문을 한 선배들의 보석 같은 동영상과 그에 상응하는 답변들이 나왔다. 속 시원한 답은 없었지만 부속품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쿠팡에서 우리 집 변기물통에 있는 것과 똑같은 부속품을 찾아 주문했다. 다음날 퇴근 후에 나는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부속품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벽에서 나오는 모든 수전을 잠근 후 사용설명서에 따라 작업을 시작했다. 물을 잠근 후 변기물을 내리면 물통 속에 빠지고 다시 물이 차지 않는다. 물통 속 부속과 연결된 너트하나를 풀고 구입한 부속을 끼워 다시 너트를 조이는 게 이 작업의 전부이다. 너트를 푸는 공구까지 함께 구매한 덕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똑같은 부속품을 구매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칭찬하며 변기 물통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잠근 수전을 열었다.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나고 가느다란 관속에서 물이 나와 변기 안으로 연결된 원통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 속 물이 차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너무 기뻐 동생에게 변기를 고쳤다고 알렸다. 동생은 장했다 칭찬을 해 주었다. 참고로 내 여동생은 나보다 5살이나 어리다.
이렇게 또 나는 '변기수리'라는 한 가지 스킬을 획득했다. 사실 손끝에 물하나 묻히지 않고 결혼생활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알고 보면 나도 공주가 좋은 사람인데 나도, 다른 사람들도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다. 남자들과 살지만 이 남자들은 실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내가 한다. 고장 나기 전에 이사를 가면 좋겠지만 입주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신축아파트라 나는 다른 문제인 줄 알았다. 고양이가 나 없을 때 물티슈를 넣었거나 젠다이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넣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집 고양이는 사료와 츄르만 아는 뚱땡이일 뿐이었다. 좀 더 머리를 쓰고 고민을 했더라면 덜 고생했겠지만 그래도 사람 부르지 않고 나 스스로 해결한 것이 다행스럽다. 전동드릴을 만지고, 형광등을 갈고, 콘센트를 교체하고, 못을 박고, 부서진 타일줄눈을 채우는 이런 소소한 일들은 해봤지만 변기는 처음이라 뿌듯하기까지 하다. 당분간 변기로 속 썩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세상은 넓고 집안일은 끝이 없다. 그리고 남자들이라고 나보다 무언가 잘한다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벽에 못질도 못하는 못난이 남자가 우리 집에는 3명이나 되니 말이다. 필요한 사람이, 잘하는 사람이 빨리 하면 된다. 시간이 없으면 돈을 쓰고 돈이 아까우면 무릎을 꿇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가 하면 될 뿐이다.
어쩌다 나는 또 하나의 스킬을 획득했다. 이제 다음 퀘스트는 무엇이 될지 나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