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지리였다.
2002년 5월 결혼을 했다.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을 해 집을 나가라는 엄마의 성화에 스물아홉에 결혼 결심을 했고 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남편이었다. 그리고 23년이 지났다. 결론만 말하면 내 결혼은 망했다. 행복할 줄 알았지만 이미 금이가고 깨진 지 오래다. 쩝쩝대며 먹는 소리가 거북하고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숨을 죽이는 내가 안타깝다.
결혼기간이 길어지면 부부는 사랑보다는 동지이자 친구이자 전우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가족도 아니고 동지도 친구도 전우도 아니다. 자신의 가치를 올리고 싶을 때는 옆에 있는 사람의 격을 올려 자신의 가치도 동반상승하는 경우와 옆사람을 깎아내려 자신의 가치를 높아 보이게 하는 사람이 있다. 남편은 후자이다. 처음 만나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 앞에서도 나를 한없이 홀대하고 깎아내린다. 그렇게 자신의 배우자를 막대하는 것이 멋있고 남자답다 느끼는 것 같다. 조선시대에서 타임슬립을 했는지 나까지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친절하게 대해 달라는 말에 집에 와서까지 자신을 내려놓고 비굴하게 밖에서 하던 거짓된 영업을 또 해야 하냐고 화를 냈다. 그러나 시부모님들 앞에서는 늘 잘란아들 어어서 그 덕에 나는 능력 있는 아들이 벌어주는 돈으로 편하게 살림하면서 돈만 써대는 모지리 돈벌레가 되어 있었다. 시어머니는 젊은 사람들의 씀씀이를 욕하며 대기업 마트는 비싸니 새벽에 일어나 30분이 걸리는 재래시장에 운동삼아 걸어 다니라고 하거나 재취업을 위해 공부하는 나에게 나이 들어하는 공부는 쓸모없는 짓 이라며 학원비나 차비가 들지 않는 청소나 마트 파트타임을 권했다. 직업의 귀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비가 아깝다며 한여름에 걸어 다니라는 말은 나에게 큰 상처를 줬다. 시간은 걸렸지만 내가 재취업에 성공하자 외벌이는 힘들다며 나의 사회생활을 적극지지했다. 그렇다고 내 사정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퇴근 후 아이들과 집안일은 다 내 차지였다. 공부에 허기진 내가 몇 년 전 대학원공부를 시작하자 또 돈이야기가 나왔다. 생활비도 주지 않는데 학비를 주겠냐며 아무렇지 않게 시어머니를 바라봤다. 언젠가부터 나는 참지 않는 며느리가 되었고 시어머니는 입을 닫았다. 내가 취업을 하자 남편은 생활비를 끊었다. 그 돈으로 술을 먹고 즐겁게 밖으로 나돌았다. 그때 나는 시급 6,470원을 받으며 하루 6시간 일을 하는 계약직이었다.
노력하지 않으면 뒷걸음질 쳐지고 앞으로 나아가도 제자리인 것 같아 나는 늘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남편과 시부모님들은 나에게 가족이 아닌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시어머니를 대신하는 수발대용품 인 무급 요양보호사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가치가 떨어지고 바보 멍청이가 된 것은 결혼 후였다.
지금 만약 내가 결혼을 하려고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면 순간의 감정이나 환경에 떠밀리기보다는 그 사람의 가치관을 깊고 넓게 보는 것을 권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널을 뛰고 생각이 바뀌어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결혼 후에도 가족 속에 꾸역꾸역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밀어 넣는다면 차라리 혼자가 속편 하다. 결혼을 하면 가족은 재정립되어야 한다. 결혼 후에도 엄마가 기준이 되어 비교한다면 가시밭길 당첨. 결혼 전 완벽한 내편인 것 같아도 결혼 후 어설프게 효자인 척 하는 사람과는 마음을 나눌 수 없다. 얼른 도망치는 게 미래의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나도 그걸 못했다.
내가 이 망한 결혼에 대해 쓰기로 한 이유는 더 이상은 결혼이라는 것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함이다. 영원히 이 글들 속에 힘들었던 시간들을 봉인하고 이제는 나를 위해 막살고 싶다. 얼마나 잘 막살지 나도 내가 궁금하다. 그리고 혹시 나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 미래의 모지리(?)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이다. 인생은 짧고 나를 아껴줄 사람은 어쩌면 나뿐일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