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ika Apr 26. 2022

보다, 더 보다.

branch

생각의 숲이 펼쳐집니다. 나무 한그루마다 품고 있는 잎들이 종이 한 장의 경계를 넘어서 뻗어갑니다.

주렁주렁 열리는 초록색 풍성함의 끝이 어딘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가 의식하고 테두리 친 울타리 안을 훌쩍 벗어난, 외부의 공기를 맡고 있지 않을까요.

담장이 너무 높아 저는 볼 수 없지만, 그 줄기와 이파리 그리고 살아 숨 쉬는 벌레들과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들. 이따금 바람에 흔들거리며 기분 좋은 상쾌함을 내뱉는 나무의 숨결과 나무들 사이를 총총 걸어 다니는 까치들까지. 보이진 않지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시야에 보이는 것들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합니다. 저는 공기를 가르며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께서 어딘지도 모를 행성을 소파 삼아 앉아 있으며 단말기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그분의 의지대로 저는 드론이 된 걸지도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황토색과 푸릇함이 버무려진 광활한 대지는 생각이 소유한 헥타르의 크기를 가늠치 못하게 합니다. 여행을 떠난 것 마냥 활기차게 돌아다니던 비행 물체는 곧 쉴 곳을 찾습니다. 따가운 눈초리로 내려보던 태양을 피해야 합니다. 그의 땀을 훔칠 존재를 검색해야 하고, 안식처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합니다. 되돌아가는 길은 더욱 많은 동력을 필요로 할 테니 새로운 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네요. 포근한 이불이, 따뜻한 충전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하루의 주인공이 된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요. 눈을 감고 뜨는 무의식적인 행위 한 번에, 시간이 물 흐르듯 지나가 버렸습니다. 시간을 지배하는 것 마냥 어느새 해가 져버렸네요. 분명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떴는데, 오후가 되더니 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각하지 못했어요. 시간이 순식간에 삭제되어버렸는데, 저는 시간의 바람에 몸을 맡겨버린 걸까요. 아니면 시간을 손아귀에 쥐어버린 걸까요. 어느 선택지에도 제 두 눈이 시간을 쫓을 순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건, 제 생각의 경계선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유한하기에 행복을 찾고야 마는, 존재의 모순적인 걸음걸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저는 행복한 순간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안정된 온기를 느끼며 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갑니다. 제가 정원사로 있는 생각의 숲이 한 점으로 보이게 되는 착시를 느낍니다. 결국은 한 점으로 시작할 뿐이었는데, 드넓은 우주에서는 티끌에 불과한 것들이었는데. 상대적 대상들.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는 것도 사실 상대적인 것들이었는데. 마치 여태 인지했던 것들이 모두 해체되는 기분입니다. 상대적인 대상인 나의 존재가 상실될 위험을 감지하고, 다시 생각의 숲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봅니다. 그곳에서 저는 불안해하지 않고, 안락함을 느낄 수 있겠죠?



감정도, 하루도, 인생도 어떤 리듬이 있어 보입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열심히 살아가던 파동의 모습을 발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일 수 있나 봐요.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파동을 내뱉고 또 맞이하는 것처럼, 존재의 삶에도 주기가 있습니다. 끝없이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직선이 아니라, 굽이치는 물결의 향을 가진 곡선의 향연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평탄한 면을 헤엄치는 것이 아니니, 파동의 자취엔 고저가 있고 또 반동이 있습니다. 화려한 무대를 연주하고 관객들의 뜨거운 함성과 박수소리를 받으며 희열을 맛본 예술가는 조명이 꺼지고, 적막이 가득한 상황을 조우할 때 더 큰 우울과 슬픔을 겪습니다.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 강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 꿈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우리는 행복을 잠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디까지 내려갈지 모르지만, 고점이 높을수록 저점이 더욱 깊숙하게 찍힐 확률이 높겠죠. 반동의 형성. 어쩌면 존재의 일대기는 파동의 형태가 아니라 틀 안에 갇힌 채 끝없이 부딪히는 핀볼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지, 우리에겐 보이진 않을 겁니다. 어딘가에선 감히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파동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됐으니, 우리는 그저 준비하면 됩니다. 올라갈 준비와 내려갈 준비를 말이죠.



보이지 않으면 눈이 멀었다는 걸까요. 하지만 우리는 여러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도 눈이 있고, 뇌에도 또 마음에도 제3의 눈이 있을 겁니다. 눈을 감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겠죠. 각각의 눈은 한 곳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곳들을 봅니다. 반대로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하나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에 보인다는 것. 하지만 때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럴 수 있고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죠. 그저 어떤 눈들을 잠깐 감아버려서 일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희망이나 사랑, 미래 같은 보이지 않는 관념들 역시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뇌와 마음의 눈들이 인식하고 안다는 것들, 깨달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보일 수 있게 전환시켜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도 그 눈들에 기반할 것일까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들. 보인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눈망울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눈이라면 보지 않을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눈이라면 기억과 경험에 왜곡과 조작이 가능하겠어요. 기억을 상실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기억을 수면 위로 올리지 못하는 것 역시 눈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겠네요. 어쩌면 이런 행위들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볼 수 있다는 건, 생존에 유리하니까요. 인간도 생물의 한 종이니까요.



종이 몇 장의 차이일지 인간이 볼 수 있을까요. 왜 인간은, 신들의 종이 되었을까요. 그 수많은 종들 사이에서 왜 유독 인간만이 특별하다고 간주되었을까요. 여러 눈들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뇌와 마음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엔 볼 수 있는 것들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여러 가능성 중에 봄이라는 선택지가 하나 있고, 또 그건 또 다른 단어 그대로 생명이 요동치고 태동하는 것들을 포함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본다는 건 정말로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 정의가 합쳐지면 본다는 것의 본질이 도출될까요?

있는 것 그대로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주만물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떠한 기준도 기대도 없이, 불행의 속성인 비교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걸 그 자체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요. 사랑을 볼 수 있을까요.

행복한 상태가 지속되게 해주는 화학물질이 뇌를 자극시키는 것을 스스로부터 벗어나 지켜볼 수 있을까요.

내가 가진 어떠한 것도 다 벗어던지고, 내가 없어진 상태에서 본다면 지혜가 시야에 들어오게 될까요.

삶의 탐구 영역에서 그토록 찾아다니던 진리가 눈에 아른거리게 될까요.

보이지 않던 신이, 보이게 될까요. 스스로 신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그런 말들이 보이게 될까요.

나 자신을 망각해버린다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게 되는 걸까요.

사랑에 빠지게 되면 보이는 것들이 있는 걸까요.

보이는 대상에 전념하게 된다면 행복이 보이게 될까요.

무아지경에 빠지면 황홀경을 경험할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도, 개안했다는 표현도, 다르게 보인다는 말과 같이 본다에 관한 수많은, 과거 현자들이 내린 본다는 것의 깊은 뜻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선조들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봤던 것들과 우리가 보는 것들도 같을지도 모릅니다. 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도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문득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중얼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의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어떤 정보의 법칙에 의하여,   있음과 보이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홀로그램일지도 모르는 세상에 그저 존재함에 또 감사하며.



 

작가의 이전글 그대라는 사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