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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노트 Aug 18. 2023

인생의 첫 실패, 이혼

내가 이혼녀라고? 진짜? 거울을 볼 수가 없었다. 

 2010년. 그러니까 벌써 13년 전인가? 그때는 서른이 넘어 결혼 못하면 노처녀라고 손가락 질 받던 쾌쾌 묵은 옛날옛적이다.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고 서른 하나인 나는 조금 늦은 편에 속했다. 사회적 시선에 떠밀려 결혼을 해 버렸던 걸까? 서른 하나라면 적지도 않은 나이지만 결혼에 관한 생각도 기준도 없었다. 


 해야 하나보다 싶어서 얼떨결에 예식장 예약까지 마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건 아니다. 이미 청첩장도 다 뿌려지고 식이 코 앞이었지만 여자의 직감이랄까 느낌이 왔다. 이 결혼은 하면 안 된다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용기를 내서 파혼을 선언했다. 양가 부모님들은 청첩장까지 다 돌린 마당에 얼굴에 먹칠한다고 나에게 욕이란 욕은 다 퍼부으셨다. 마음 약한 바보천치인 나는 결국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결혼식장을 들어섰다. 그리고 그 불편한 결혼은 삐그덕 삐그덕 시간을 흘려보내게 된다.


 허니문 베이비가 떡하니 생겼다. 어느 시트콤에서 의사들이 그랬다. 30대에는 감기 걸리듯이 임신이 된다고... 내가 딱 그 짝이었다. 그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한 아이의 엄마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태명도 지어졌다. 왜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시댁 쪽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믿음, 소망, 사랑의 그 사랑 느낌으로 지어진 것 같다. 그렇게 결혼식 전 브레이크를 밟고 주춤거리다 결국 정신없이 전속력으로 질주해 버린 결혼 생활은 쉽지 않았다. 


 둘 사이의 의견 충돌도 잦았고 무엇보다 서로 애정이 없었다. 겨우 아이를 향해 각자의 애정을 쏟을 뿐이었다. 임신 덕분에 더더욱 관계를 하지 않았다. 의무감에 지속된 결혼 생활은 늘 서로가 의견 내세우기 바빴다. 그만한 기운은 어디서 났었는지 그렇게나 건조하게 싸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도 잘한 거 하나 없고 지혜롭지 못했다. 내가 무교론 자라 그런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서로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가 정말 맞지 않았다.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결혼 전 찾아왔던 그 순간. 그만 둘 용기조차 큰 목소리 내지 못했던 과거의 내가 참 안쓰럽다. 처음부터 불안정한 결혼은 아기 '사랑'이는 뱃속에 있었지만 진짜 사랑은 없었다. 그렇게 어거지 결혼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이는 참 신비롭고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돌이 되었을 때 남편은 관계를 요구했다. 마음의 문도 몸의 문도 모두 꽉 잠겨버린 나는 그 상황이 죽기보다 힘들었다. 점점 사이가 더 멀어져 갔다. 그게 시작이었을까 더 날카로워진 남편은 사사건건 시비였다. 모든 것에 화를 냈다. 의견을 절대 굽히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급기야 폭력을 휘둘렀다. 나도 맞서 싸웠다. 소리도 질렀다. 기진맥진한 그 상황에 바닥까지 내려간 내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부모님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친구들에게도, 지인 어느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내 상황을 알리기가 부끄럽고 괴로웠다. 내 결혼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터는 사람들 앞에서도 폭력이 이어졌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내 상황이 오픈되어 버렸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아이를 보면서 이혼만은 할 수 없다고 다짐했다. 뱃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새 4살이 되었다. 어느 날 손을 잡고 길을 걷는데 나에게 묻는다. "엄마는 행복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아이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그때 알았다. 나의 행복하지 않은 감정상태가 오롯이 아이에게 전해지고 있었구나...... 아이를 핑계로 용기 내지 못했던 이혼이라는 단어를 아이를 위해 꺼냈다. 


 쉽지 않았다. 나 혼자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 날엔 조르고 졸라 결국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그가 영상 교육이라던지 상담에 나타나지 않아 이혼이 성립되지 못했다. 다시 이혼을 시도했다. 역시나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폭력은 이어졌고 결국 나는 경찰을 부르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었다. 정신없이 걷고, 울었다. 눈을 떠보니 성당 안 벤치에 앉아있는 나와 마주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몸이 아팠다. 암세포가 온몸으로 번지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부모님께는 비밀이었다. 죽을 것 같아 난생처음 정신과를 찾아갔다. 누구라도 붙들고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었다. 선생님은 내 말을 미동도 없이 들으시더니 "그렇게 평생 사시던지, 정리하시던지 본인이 선택하세요. 그리고 아프지도 않으신데 병원에 더 이상 오지 마세요. 꼭 와야 할 사람이 안 오고 안 와도 되는 사람이 찾아온다니까요. " 그 말이 너무 충격 적이었다. 평생 그렇게 살거나 정리하라는 심플한 대답. 나는 비로소 정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세 번째 이혼 접수를 했다. 그에게 물었다. 소송할까? 합의이혼 할래? 마침내 미련하게 7년을 허우적거리다  합의 이혼을 이뤄냈다.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온몸에 퍼져있는 것만 같던 암세포가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더 큰 공포가 밀려왔다. 스스로 이혼이라는 인생의 첫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이혼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혼이라는 실패를 내가 했다고? 이혼녀라고 남들 앞에서 절대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의 정체성이 흔들렸다.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실패한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혼하면 속 시원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지하로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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