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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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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칼랭 Jun 26. 2021

감정 쓰레기통이 되면 좀 어때서

#친구를 위한 #나를 위한 감정 쓰레기통


  

어린 후배가 내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시간이 막 지난, 바쁜 일상에 사로잡혀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후배는 작은 새처럼 날개를 움츠리고 울었다.


내가 힘주어 끌어안아주자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몇은 우리를 쳐다봤고, 또 몇은 힐끔거렸지만.

우리는 한참을 계속해서 그렇게 있었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해 내뱉은 말이 겨우 이것이었다.     


 “미안해……. 네가 이렇게 힘든 걸, 내가 몰라서.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그게 미안해.”               


          


 


방송작가는 힘든 직업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이 힘들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겪은 일은 이것이 전부여서 또 말할 수 있다. 방송작가는 외롭고 힘든 일이다,라고.      


방송에는 '방송시간'이라는 정해진 마감이 있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수없이 많은 계획과 약속이 줄 서 있다. 아이템을 찾고 답사를 가고 사전 미팅을 하고 촬영 콘티를 짜고 구성안을 만드는 작업을 지나고 나면 촬영하고 편집하고 CG를 입히고 성우의 더빙에 음악을 덧붙이는 과정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순서 안에 작가와 연출자를 비롯해 다양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마감에 쫓기며 산다.


그래서일까, 가끔 내가 일하는 곳은 더없이 뜨거웠다가도 이내 차가워진다.

그렇게 불시에 찾아온 힘든 시간 속에 위로가 되는 사람은 동료일 수밖에 없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배'일 것이다.      


그날 나의 품에 안겨 울던 후배는 나와 팀을 이뤄서 일하던 이른바 ‘막내 작가’였다. 이들이 하는 주된 일은 '모래에서 진주를 찾듯 아이템을 찾는 것'과 '끝도 없는 취재와 섭외'를 감당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깨어있기도 했을 것이고, 모두 퇴근한 사무실 불을 끄고 건물을 빠져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병가를 내고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운 사이에, 후배는 그만둘 것을 결정했다고 했다. 업무의 하중과 중량, 질량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 진짜 이유가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나는 내 빈자리가 후배에게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나의 후배가 울고 있는 어떤 이유와 상관없이 나는 잘못이 있었다. 후배가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기 전에, 이유를 알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했어야 한다. 고민하던 시간 안에 같이 있었어야 했고, 흔들리는 후배의 시선을 마주 보고 알아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 없었다.      


그 고통의 시간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을 지켜볼 눈을 갖지 못했다면, 이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날 사람들로 붐비는 점심에, 커피를 사려고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울기로 했다.

          



며칠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시원한 막국수를 한바탕 먹고 낯선 카페에 앉아 다시 슬픔을 마주했다.     


 “왜 좀 더 일찍 말하지 않았어?”     


후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왜?”       

   

후배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해주었다.     


 “아무도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위로를 받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상처를 드러내고, 울어버리는 과정이 과연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일까.

친구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우울의 감정은 도대체 언제까지 나 혼자만의 것이어야 하나.     


위로받는 법도 잊어버렸고, 위로받을 시간도 잃어버렸다.

쫓기며 사는 삶의 한 귀퉁이에서 잠깐 멈추고 생각해본다.      


진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줄 순 없을까.    


     



    

나는 인생의 긴 시간을 한 남자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살다 간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모드 루이스(Maud Lewis)’다.     


모드 루이스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평생 그림을 그렸던 민속 화가인데 그녀의 그림을 단 한 번이라도 본다면 그 화폭에 채워진 강렬한 명랑함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장애인이라는 것과 평생 오두막에 살며 굽은 손가락으로 행복한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게 되면, 그림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 순간 누구나 그녀의 그림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다리가 세 개인 소들>과 <스키타는 아이들>



예상하지 못했던 불편한 감정과 슬픔이 찾아올 때면 나는 모드 루이스의 그림을 펼쳐본다.

 

그림 속에는 어린 시절 키우던 고양이가 털을 세우고 있고, 풀 먹이던 소가 멍에를 달고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도 한다. 그녀가 얼마나 재치 있는 사람인가를 알게 해주는 건 그녀의 상상 속에 키워오던 빨간 가슴을 가진 파랑새 때문이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면서도 가난한 삶을 부인하듯 그림을 가득 채운 파란 하늘과 파란 물을 보면 미소가 생긴다. 하얀 구름과 하얀 눈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하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 역시 그녀의 손을 잡고 캐나다의 어느 작은 마을 ‘노바스코샤주 바튼’이라는 곳으로 - 하늘을 날아 '명랑한 여행'을 가게 된다.     



'모드 루이스'의 생전 모습



등과 허리가 굽고 손가락도 펴지지 않던 모드는 서른넷이 되던 1938년 1월에 결혼에 성공했다.

당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결혼하던 사람들과 비교하면 정말 늦은 결혼이었지만, 그녀에겐 감사한 일이었다. 어쩌면 기적이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결혼에 성공한 것은 ‘에버릿’이라는 남자의 가정부가 되면서였다.

44세 독신남이 가정부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무턱대고 집으로 찾아갔던 모드는 가정부가 되겠다고 우기다가, 그림을 팔아달라며 동업자가 될 것을 제안했다.

모드는 외롭게 혼자 사는 나이 든 남자와 결혼해 ‘평범한 다른 여자들처럼’ 살기를 원했고, 남자는 집안일을 해줄 여자가 대가 없이 그림을 제공한다고 하니 프러포즈를 거절하지 않았다. 서로의 욕구를 위해 한 발씩 양보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모드의 삶은 ‘생계형 작가’로 바뀌었다.

남자가 페인트를 구해다 주면 모드는 아무 불평 없이 행복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건 생각보다 돈벌이가 됐다. 그녀는 보이는 모든 것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하나가 그녀의 집이었다.


창문에 그림을 그리고 벽을 색칠 한 뒤 ‘PAiNTiNGS, F◎R SALE.’라고 기록해 팻말을 세워뒀는데 이것을 보던 사람들은 운전을 멈춰야 했다고 한다. 글자 옆에 그려진 명랑한 노랑나비와 파랑새들 때문이었으리라.      

    




모드 루이스의 생애를 기록한 책 <내 사랑 모드>




 작은 오두막집에서 에버릿은 매일 아침 방 한 조각과 차 한 잔을 마신 후

 설거지할 접시들을  스토브 위 솥에 집어넣은 다음 모드에게 물감을 가져다주었다.

 창가 의자에 앉은 모드는 앞에 놓인 다리 달린 쟁반은 식탁에서 이젤로 바뀌었고

 모드는 가장 저렴한 페인트 희석제인 테레빈유를 위태위태한 쟁반에 놓인

 켐벨 수프 깡통에 조금 부었다.

 모드가 팔레트로 사용한 것은 납작한 생선 통조림 깡통이었다.    

  

 - 모드 루이스의 인생을 기록한 책, ‘랜스 울러버’의 <내 사랑 모드> 중에서        

  


모드가 유명한 작가가 된 뒤에도 남편은 모드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프기 전까지 하루에 한두 장씩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춘 적이 없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남편이 모드의 노동력을 갈취한다고 비난했지만 모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여기가 좋아요. 어차피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으니까요.

 내 앞에 불만 하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모드는 돈에 집착했던 남편에게 평생 이용당하며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살았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을 통해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에 안정감을 느낀 그녀는 남편에 대한 타인의 시선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했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모드에게는 슬픈 감정과 외로운 생각들 쏟아부을 감정 쓰레기통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준 재료들은 '붓과 물감, 그리고 그림을 그려야 할 어떤 것'이었다.       

 

  

 모드는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그렸다. 같은 형태는 물론이고, 페인트만 있으면

 같은 색을 사용한 똑같은 그림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 장면을 마치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듯 반복한 것이다.    

  

 - 모드 루이스의 인생을 기록한 책 ‘랜스 울러버’의 <내 사랑 모드> 중에서    



그녀는 노래하듯 기억을 꺼내 그림으로 그려냈다. 똑같은 풍경, 똑같은 주인공들이 가득한 명량한 그림들은 마치 복사한 듯 그려졌고 또 팔려나갔다.


돈은 상관없었다.

'그림 그리기'는 그녀의 감정을 회복시키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드의 일생을 담은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샐리 호킨스, 에단 호크가 출연한, '에이 슬링 윌시' 감독의 영화였는데 원작의 제목은 <MAudie(모드)>였다.


한국에서는 '내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돈 안 드는 직업이 작가라는 데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던 선배가 있었다.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글로 꿈을 꾸고,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축복할 수도 있다.


 역사를 기록했으니 장엄하고, 독립운동도 했으니 경건한 일이기도 하다. 자유를 위한 투쟁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것이 글이라고 생각하면 나의 직업이 더 좋아진다. 아니다.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글을 쓴다는 것'이 좋아진다.  


그리고 글 쓰는 일은 나에게도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줄 때'가 있다.



 <허수아비>

     

 여보시오 거기 누구시오

 내래 한 발로 서 있어 갈 수 없소

 나를 봐주시오     


 여보시오 거기 누구시오

 내래 움직일 수 없어 갈 수 없소

 나를 찾아주시오     


 여보시오 거기 누구시오

 내래 낡은 옷을 입어 견딜 수 없소

 나를 안아주시오     


 여보시오 거기 누구시오

 내래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외발이 허수아비 라오

 나를 잊지 마시오          



 이 시는 중학교 2학년 때, 나를 포함해 뭉쳐 다니던 7명의 친구가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눠 싸우던 시절에 쓴 시다. 우리는 7명이기 때문에 '무지개'라고 부르기고 한 뒤 빨주노초파남보로 이름을 만들었다. 색을 하나 정한 뒤에 ‘희’ 자를 붙여 별명을 만들기로 했는데 나는 이름은 초희였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나는 가운데에 있었다.     


누구의 편도 될 수 없던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학교에서 시 쓰는 숙제가 있었는데 글쓰기를  감정 쓰레기통 삼아 나를 ‘허수아비’라고 비유해 시를 썼다. 그때 ‘내래’라는 말을 쓴 건 당시 어떤 영화에서 들었던 북한 사투리가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시로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고 백일장이라는데 나가기도 했는데 ‘이 시 정말 너가 쓴 거야?’라며 의심하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나의 시가 어두운 시라는 걸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그냥 기분 나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알 수 없는 우울감, 끝이 없는 상실감, 어떤 존재라는 외로움, 인간이라는 근원적 연약함.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이 찾아오는 밤이면 나는 컴퓨터를 켠다.      


친구의 우울과 가족의 슬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아픈 이야기가 전해지는 밤에도 나는 컴퓨터를 켠다.


펜과 노트 대신에 ‘타닥타닥’ 비명을 질러주는 컴퓨터가 있어서 좋다.


그래서 오늘 이 밤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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