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로칼랭 Mar 08. 2022

싱어게인에 소모되는 눈물

#다시 #나를 부르다

Sing again. 

이렇게 쓰고, 무명가수전이라는 타이틀을 얹은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방송은 지난 몇 주간, 몇 달간, 월요일 밤에 시작됐다.


매주 월요일 저녁이라고 하면 나에겐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한숨 나고, 조금 더 피곤한 날이기도 했다. 일요일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날이 월요일이니까. 

시청률 족쇄에 갇혀, 좌절하는 하루를 보낼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꽤 오랜 시간 나는 월요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바쁘게 시작되는 하루와 한 주간이 부담스러웠었다. 


그런 나에게, 월요일 밤에 찾아온 이 방송 프로그램은 묘한 위로가 됐다. 

그것도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내가 위안을 얻게 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해봤기 때문에 온전한 시청자의 입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양의 영상을 보고 추려내 편집할 제작진의 노고를 공감하는 마음이 늘 앞섰다. 그래서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싱어게인을 보고 있으면 3~4분밖에 안 되는 짧은 노래를 듣는 동안 누군가의 삶을 공감하게 된다. 

그건 아마도 제목 때문일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 그리고 숫자로 불려야 한다는 것.


무명가수전


방송을 보는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누군가의 삶을 공감하게 되면, 꼭 울게 된다.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 꿈이 좌절됐던 순간 때문에 마음 아프다가 '유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이루어지기 힘든 도전이라는 걸 알기에 슬퍼진다.

높이 날아오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는 나이를 살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내가 왜 이렇게 매주 월요일 밤마다, 나의 눈물과 에너지를 타인에게 소모하는 걸까.

소설과 영화, 드라마의 주인공에 투영되듯이, 또 나의 눈물을 그곳에 담고 있는 걸까.






그럼에도 매주 월요일 밤이 되면, 지친 나의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에 TV를 켠다.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사람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는 사람들의 달라진 표정을 보기 위해서.

우울했던 저들의 얼굴에 미소가 스미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방송을 보고 있던 것뿐이지만, 나의 눈물이 누군가의 미소가 된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 그렇게 월요일 밤이면 TV 앞에 앉아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인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떠올린다.  

이름을 부르고, 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에게도, 또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좋다.

그래서 어느새,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성실한 시청자가 되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