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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우디아 Jul 31. 2021

구기동에서 2

노부부의 집





집을 고를 때 내가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것이 환기와 햇빛이다. 비봉길의 빌라는 그 두 가지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부동산 사장님을 앞세워서 다음날 다시 그 집에 갔다. 생수 한 병을 고를 때조차도 여러 요소가 작용하는데 하물며 집을 사는 일인데, 어마 무시하게 꼼꼼히 살펴보리라 마음을 다잡고 메모장에 만들어둔 체크리스트를 꺼내 들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현관문을 열며 집이 비어있는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흔이 넘은 노부부 두 분이 사시던 집이었다고. 몇년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할머니께서 홀로 지내셨다고. 차츰 기력이 기울어지신 할머니께서 두어 달 전 외손녀 집에 가신 후 계속 비어있었다고. 꽤 오랫동안 비어있었던 집안 어디에서도 불쾌한 냄새 한 줄기 흘러나오지 않았다. 니스칠이 빤질빤질한 마루와, 집안 곳곳에 제자리를 차지한 채 앉거나 서있던 가구들 어디에서도 삶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찬거라가 가득한 시장바구니를 든 집주인이 금방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것 같았다.




거실 한쪽 장식장엔 놀랄 정도로 많은 LP판이 꽂혀있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당장이라도 흘러나올듯한 커다란 확성기가 축음기와 엠프 옆에서 귀를 크게 펄럭이며 앉아있었다. 할머니를 남겨 두고 떠나신 할아버지, 홀로 남은 할머니의 시간, 그분들의 마음에 새겨졌을 LP판의 음표들, 축음기, 아 나는 이런 서사에 많이 약한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때부턴 가슴보다 머리로 집을 보려고 구태여 애를 썼다. 노란 창문 난간색이 눈에 조금 거슬리기는 했다. '아 옐로 골드는 좀 시른데,' '현관이 좀 좁아, 힝, 등산화 끈 맬 때 의자에 앉아야 하는데 의자를 놓기에는...' '이 코딱지 만한 베란다는 어떤 용도로 써야 할꼬?'





용도를 정하기에 애매한 크기였던 베란다, 와인셀러(?)겸 팬트리로 변신






이사 초기 대충 모습을 갖춘 와인셀러 겸 팬트리






거실 북서쪽에 위치한  와인셀러 겸 팬트리 입구




그날 이후 여러   집에 가보았다.  안팎을 요리보고 조리 보고, 골목길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아침에도 가보고 저녁에도 가보고 특히 주말에도 가보았다. 등산로 초입이라 주말이면 등반객이 어김없이 무리지어 등판하는 장소이다. 그들로 인해 혹시나   골목이 시끄럽지는 않을지 확인해야 했다.  빌라가 이끄는 등반길은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첨부터 끝까지 바위 덩어리 길이어서인지 예상보다 등반객이 많지 않았다. 주차장을 지층에  건물의 3층이므로 실제론 4 높이여서인지, 아니면 두툼한 석벽 덕택인지 이중 창문들을 닫으니 외부의 소음이 싸그리 사라지고 아늑함이 그 자리를 웠다.




부동산을 통해 집주인 측과 이사날짜, 계약금, 잔금 등을 협의했다. 내 요구 조건에 대해 할머니 측에선 절대 안 된다에서 안된다로, 안되지만 그렇지만 할 수 없이... 쪽으로 조금씩 다가왔고 나도 두어 가지를 손을 떨며 양보했다. 3월 25일 매매계약서를 썼다.




그 뒤 나의 시간, 집수리 과정이 시작되었다. 집 보러 다닌 시점부터 내가 앞으로 살 집에 대한 그림이 있었다. 집수리의 중심 테마는 '관을 짜는 것'이었다. 두 아들이 들으면 질색팔색 하겠지만, 남편에게조차 내 이런 심정을 드러낸 적 없지만 내 마음은 그러했다. 변덕의 최고수인 운명이 나를 또 어떻게 요리할지 알 수 없지만 내 나이를 고려한다면 이번 집은 나와 남편의 '관'이 되어 주면 좋겠고,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오히려 내 남은 시간은 제법 괜찮은 편이 되지 않겠는가.




아흔이 넘은 노부부가 살던 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 홀로 2년여를 사시던 집이라는 이곳의 서사가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공사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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