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공사 1 - 열린 견적서
이사를 할 때 집안을 죄다 뜯어고친 인테리어 공사가 나에겐 3번째이다. 처음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내 심정은 그 집에서 '천년만년 살리라' 였기에 그에 걸맞게 인테리어 공사도 장하고 거했고, 가전제품과 가구까지도 싹스리 갈아치웠었다. 20여 년 살았던 그곳에서 아이들이 크며 우리 집의 작고 큰 역사가 대부분 만들어졌다.
뜬금없이 원하지도 않았던 급관심을 내게 쏟아부은 운명의 여신이 휘두른 매서운 채찍질에 두 번째 이사를 강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사연은 다른 글에서 조금 풀었다.
부동산 정책으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번 이사가 부디 내 마지막 이사이기를 엎드려 기도하며 인테리어 공사 과정에 들어갔다. 인테리어 업체 3곳에서 견적을 받았다. 유튜브, 블로그를 포함한 각종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곳 중에서 상호가 'OOO의 열린 견적서'라는 곳에 특히 관심이 갔다. '열린 견적서'라는 워딩이 내 이성을 강하게 감아 챘다.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 인테리어 견적서 위의 빼곡한 글자들은 해자를 이중삼중으로 두른 난공불락급의 성채이다. 제대로, 꼼꼼히 봐야지라는 결심을 아주 쉽게 무너트리는 것이 젠다이, 내력벽, 조적벽, 무 몰딩, 덧방 공사 같은 견적서 위의 전문용어들이다. 강마루와 강화마루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이 이것 같고, 도긴개긴이며, 오십 보 백 보'와 같은 저런 워딩 앞에서 일단 내 마음은 쪼그라든다. 큼큼! 호흡을 고르며 다시 견적서를 들여다본다. 반갑게도 '싱크대'라는 익히 아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아싸! 요거야 내가 당근 알지. 크윽 흡! 근데 싱크대 항목의 '하이그로시'? 뭐 대충 반짝거린다는 뜻인가 많이? 헉 '도장'은 무엇이고, '멤브레인'은 또 무엇인고? 싱크대에 내 이름을 새긴 도장을 콱콱 찍어준다는 뜻인가? 뭐 시그니쳐 그런 거?
모르스 암호 같은 견적서 위의 글자와 그 옆에 동그라미를 한창 달고 있는 가격을 보며 우리 일반인이 제법 아는 체할 수 있는 것은 길어야 1~2분 정도이다. '믿겠어요, 정말 믿어도 되지요, 믿고 싶어요'라는 희망을 장착한 미소를 온 얼굴에 주렁주렁 달고서 우리는 몇백만 원에서 몇천만 원을 지나 억대에 이르는 견적서에 사인을 한다. 후달달 떨리는 발걸음으로 비실대며 그저 인테리어 사무실을 나설 뿐이다. 거간의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열린 견적서'라는 워딩에 현혹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친과 자기 방에 들어간 우리네 딸들이 방문을 활짝 '열어' 놓으며, '뽀뽀 뭐 그런 은밀한 거 안 할 거거든요, 우린 그저 어릴 적 앨범을 조금 들여다볼 거거든요!라고 보내는 메시지와도 같지 않은가?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와서 들여다보시오! 컴온 컴온을 외치는 열린 견적서’라는 위풍당당한 워딩, 당신의 작명 센스에 건배를!
인테리어 요청서, 인테리어 견적서, 인테리어 시공자 측의 후기, 인테리어를 맡긴 측의 후기, 인테리어 AS를 받은 측의 후기 등을 '활짝' '오픈'하는 곳의 홈페이지를 정독했다. 공사 요청서를 보냈다. 현장을 실측했다. 견적서를 받았다. 이 모든 과정이 홈페이지를 통해 '오픈'되었다.
인테리어 사무실을 방문해서 실내 공사에 대한 내 희망을 좀 더 구체적으로 피력했다. 시공자 측으로선 '알겠습니다, 알겠고요, 그런데...' 혹은 '일단 들어는 드릴게'라는 반응이 나올법한 무리한 희망사항도 있었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겠어요 그래도 한번 해보기는 할 건데요 하아!! 네 한번 해볼게요'라는 심정적 톤을 그들의 어조와 서너 번 반짝거렸던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읽었다.
며칠 후 내 희망이 반영되어 수정된 견적서가 왔다. 4월 19일 시작하는 인테리어 공사 계약서에 나는 사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