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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우디아 Jan 05. 2023

도쿄여행 3

2022, 12월 5일. Tokyo Tower





"마치 팽이의 심처럼 정중앙에 우뚝 박혀 있습니다, 도쿄의 중심에, 일본의 중심에, " (영화 '도쿄타워'에서).




마사야(오다기리 조)는 엄마가 입원한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쿄 타워를 '도쿄의 중심, 일본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여행 둘째 날 아침, 밥을 먹기 위해 호텔 33층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여 바로 그 '일본의 중심'이 제대로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식당입구에는 쓰고 온 마스크를 넣는 봉투와 일회용 장갑이 비치되어 있었다. 패드에 손을 갖다 대면 납작하게 겹쳐져 있던 일회용 장갑들 중 맨 위의 것이 봉긋하게 솟아올라 손을 집어넣게 되어 있었다. 코로나시대를 3년 넘게 살다 보니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장치들이었다.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고 창밖의 도쿄 타워를 배경으로 사진을 두어 장 찍은 후 음식을 담기 위해 일어섰다.









일본여행 중 끼니때에 제공되는 것들 중에 선택지가 있다면, 나는 김, 하얀 쌀밥 그리고 오이를 꼭 먹는다. 일본의 오이는 다르다. 우리나라 오이는 묵직하게 여겨질 정도로 대단히 경쾌하게 아삭거리는 오이로 그리고 쌀밥과 김으로 나는 그 식당, 그 밥의 수준을 판가름한다. 프린스 파크타워 도쿄 호텔의 뷔페식당이 준비한 오이는 내가 먹어 본 것 중 탑 3였다. 나는 다른 음식들을 반찬삼아 그 오이를 먹고 또 먹었다.





야채, 오믈렛, 명란, 그릭요구르트, 크루아상등 '글로벌'한 음식들을 쌓아놓고 와구와구 먹던 와중에 희미한 인기척이 나서 옆테이블을 보았다. 브라운색의 체크셔츠를 베이지색의 브이넥 니트 안에 받쳐 입고, 트윌 조직의 짙은 갈색 바지에 더 짙은 갈색의 구두를 신은 할아버지, 서로 톤이 다른 회색 캐시미어 원피스와 카디건을 입은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브라운' 할아버지와 '그레이' 할머니 쪽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뻗치고 귀를 기울여 조근거리는 그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일본인이었다. 그 테이블 위에 적당히 놓인 삶은 브로콜리, 삶은 고구마, 삶은 당근, 찐 연어, 미역미소된장국, 밥을 보게 된 나는 황급히 눈을 돌리고 고개도 조심스레 거두어들였다.









배를 채운 후 커피를 홀짝여 식도와 위를 달래면서 식당 안을 둘레둘레 살펴보니, 대충 보아도 서빙하는 직원들 수가 살짝 놀랄 정도로 상당히 많았다. 손님 수보다 더 많은 듯한 착각도 잠시 했다. 저 많은 직원들의, 저렇게도 차근차근한 말투나 행동은 부모에게 배우는지, 학교에서 배우는지, 직장에서 배우는지. 직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수많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는 넓은 식당 구석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서성이다, 쫑긋거리는 내 귀에 은근한 데시벨로 흘러들었다.      




영화화된 '소설 도쿄타워'를 나는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 이 책을 읽었을 때 마침내 개인사와 겹쳐 나는 많이 울었고 오랫동안 괴로웠다. 오다기리 조와 키키키린이 주연이라니, 이 조합이야말로 반칙 중에 반칙이기에 더욱 보고 싶지 않았던 이 '유명한' 영화를 올해 초에 보았다. 코로나사태가 시작되고 진이 빠지는 시간이 기약 없이 흐르고, 작은 감옥, 조금 더 큰 감옥, 조금 더더 큰 감옥에 갇힌 마요르카 목각 인형이 된 듯한 답답함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얼굴과 패션을 함부로 써서 오히려 좋은 오다기리 조나 실컷 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보았다.




킬링  포인트 범벅인 이 영화를 다 본 후 한 가지가 내게 남았다. 이영화는 키키 키린의 것이다. 키키 키린이 연기한 엄마가 이영화의 주인공이며 내가 바라는 죽음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 영화 '도쿄타워'를 본 내게 남은 '한 가지'였다. 떠오르는 죄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죄가 산더미임을 잘 알고 있기에 병도 없이 고통도 없는 죽음을 감히 내가, '쟁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쿄타워'의 엄마는 암에 걸린다. 엄마는 치료 중의 고통을 최선을 다해 치르어낸다. 엄마의 고통을 보며 마사야도 자신의 몫인 고통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들과 엄마가 치료를 중단하기로 서로를 납득시키고 납득하는 과정이 나에겐 죽음에 이르는 장대한 여정처럼 느껴졌다. 이것 하나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며 고향마을에서 챙겨 온 쌀겨된장으로 만든 가지 된장국과 도미회, 고통으로 정신을 잃은 엄마가 마사야에게 이 두 가지를 잊지 말고 챙겨 먹으라고 말한다. 아들식구가 온다는 전화를 끊자마자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달려 나가 밭에 심어 놓은 배추를 뽑는다는, 귀촌한 내 친구의 말처럼, 엄마들은 이러하다.  ‘어미’와 자식을 관통하는 가장 중심에 음식이 있다, 마치 팽이의 심처럼.




마사야의 '마음'을 흔들지 않고 엄마는 떠난다. 이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흔들린 효심의 기억은 남은 자식을 아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나는 '겪어서' 알고 있다. 엄마가 떠난 후,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함께 '오랫동안 '많이' 먹은 친구들과 엄마 이야기를 나누는 마사야가 내게는 이 영화의 절정이었다. 바로 이것이 언감생심 내가 '감히' 꿈꾸는 모습이다.




도쿄 타워가 제대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5일 내내 나는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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