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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May 30. 2023

성북동 라푼젤

8개월 간의 성북동 라이프가 끝났다.

너무 생소한 동네라 처음엔 호기심 반 걱정 반이었는데, 떠난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했다.

시원한 것은, 성북동 살았던 집이 단기 거주 목적으로 급히 구한 집이라 너무 열악했기 때문에 어서 빨리 보다 넓고 깨끗한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어서 그랬고,

섭섭한 것은, 성북동이라는 동네 자체는 여러 면에서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조금 아쉬워서 그랬다.


성북동은 사실 남편의 회사 및 꿀댕이의 어린이집과 가깝다는 이유로 선택한 곳이었다.

계약하기 전 회사에서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테스트해 볼 겸 차로 이동해 봤는데, 그 길이 너무 예뻤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지나 삼청동 길로 접어들면 보이는 아기자기한 카페며 가게들,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언덕길의 나무들, 곳곳에 보이는 예쁜 저택들, 눈호강을 하다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8개월인데 뭐 어때, 살아보자! 하고 결정하게 된 데에는 그 길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영향이 컸다(하지만 8개월은 그리 짧지 않은 기간이었지..).

퇴근할 때에는 남편 회사에 들러 남편과 꿀댕이를 만나 집으로 함께 돌아오는데, 나는 아직도 집까지 갔던 그 길이 한 번씩 생각난다.

전혀 지루하지 않고 창 밖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반면 집에 도착하는 순간 고립 상태가 되었다.

흔히 우스갯말로 스세권, 맥세권이라 하는데, 그 동네는 스타벅스나 맥도날드는 커녕 동네 카페도 하나 없었다.

cu 하나만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조금 후 이마트24가 새로 생긴 정도였다.

주변의 골목길은 날이 깜깜해지면 으슥해져 혼자 걸어다니기에 위험해 보였고, 차도와 인도가 구별되어 있지 않아 아기와 주변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영 불안했다.

특히 나같은 뚜벅이(네, 장롱면허 11년차입니다)는 어디라도 한 번 나가려고 하면 버스를 타야만 했다.

이건 뭐, 성북동 라푼젤이 따로 없었다.

라푼젤은 머리카락이라도 탐스럽지..;;(뜬금없네)

아무튼 그 만큼 주변에 뭐가 없단 얘기.


그래도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맛집이랑 예쁜 카페도 많고 박물관, 미술관 등도 많아서, 성북동에서 사는 동안 여기저기 많이 다녀보자고 남편과 얘기했었다.

생각보다 많이 다니지는 못했지만, 여기 살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좋은 곳들을 꽤 알게 되었다.

생각나는대로 조금만 추려보면,


1. 먼저 우리의 원픽 베이커리 밀곳간!

이 근처 많은 베이커리카페를 가 보았지만, 순수하게 빵이 가장 맛있었던 곳은 밀곳간이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아도 빵의 종류는 많았는데, 정말 다 먹어보고싶을 정도로 하나하나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가성비템인 소금빵은 물론 각종 건강빵, 페스츄리류, 파이류, 먹어본 것들은 다 맛있었고, 특히 단호박과 크림치즈, 해바라기씨, 무화과가 가득 들어간 빵(행복주머니였나? 이름도 마음에 듬)은 갈 때마다 꼭 사올 정도로 좋아하는 빵이었다. 여기를 자주 갈 수 없다는 게 제일 아쉬움.


2. 떡카페 수연산방, 동병상련

성북동에 멋진 카페가 많지만, 다른 곳에는 잘 없는 떡카페가 이 근처 마음에 드는 곳이 두 곳이나 있어서 좋았다. 수연산방은 인절미, 오미자차도 맛있지만 특히 빙수가 진짜 맛있는 곳. 내가 좋아하는 단호박과 팥이 달지 않게 졸여져 우유 얼음 위에 소복하게 올려져 있고 쫀득한 인절미도 두세개 톡 놓여있었는데 내가 먹어본 빙수 중 내 입맛에 가장 맞는 빙수 중 하나였다. 생각하니 입에 침이 고이는구만.

동병상련은 길상사 옆에 있는 곳인데,  6시까지밖에 영업을 하지 않고 일요일은 휴무라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토요일 어중간한 시간에 갔을 때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우리가족끼리 편하게 있던 기억이 난다. 영업종료가 임박한 때여서 그런가, 맛있다는 쑥버무리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인절미랑 다른 떡도 맛있었고 모과차도 향긋했다(여기서 팥빙수도 먹었는데 빙수는 수연산방이 더 내 스타일). 길상사에서 산책하고 여기서 떡과 차를 먹으면 좋은 코스!

수연산방의 빙수, 인절미, 오미자차(유과는 서비스)


3. 식당으로는 면옥집과 누룽지백숙, 모짜, 조비스그릴

면옥집은 집 가는 길에 있어 즉흥적으로 몇 번 갔는데 갈비찜이며 갈비탕, 모듬전, 냉면, 만두, 먹어본 매뉴가 골고루 다 기본 이상은 했다. 동네 주민들도 많이들 오는 것 같고 항상 사람이 꽤 있는 걸 보니 오래된 맛집인 듯.

누룽지백숙은 초반에 갔던 곳인데, 맛있고 꿀댕이랑 같이 먹기도 좋은 메뉴라 성북동 사는 동안 몇 번 더 갈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더 안갔네. 여하튼 백숙이 슴슴하고 누룽지도 맛나고 양도 많아서 아기랑 가족끼리 가기 좋은 곳이다.

모짜는 이태리레스토랑인데, 분위기도 괜찮았고 화덕피자가 맛있었음. 우리집 남자들이 피자를 좋아하는데 이 근처에서 피자먹고 싶을 때 들러봄직한 곳.

조비스그릴은 필리핀레스토랑이다. 좀 생소하지만 도전해 볼 만한 곳. 인테리어도 현지느낌에다가 현지분들이 조리도 하시고 서빙도 하신다. 망고쥬스를 시켰는데 완전 생망고를 갈아넣은 맛! 꿀댕이가 너무 좋아해서 본인 앞에 갖다놓고 마시다가 반쯤 쏟아버렸는데, 쏟은 양보다 더 많은 양을 다시 가져다 주셔서 감사했다.

통오징어구이랑 코코넛맛 가득 나는 필리핀카레도 추천.

쏟아버린 망고쥬스와 다시 가져다주신 쥬스. 맛있었던 통오징어구이.



4. 우리옛돌박물관

여기는 진짜 잘 몰랐던 곳. 숨은명소까지는 아니고 고즈넉하니 사람 붐비지 않는 곳에서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푸릇푸릇 나무가 울창하고 박물관 위에서 보는 서울 풍경이 볼 만하다. 입장료가 있고 1년동안 무제한 방문할 수 있는 회원카드도 파는데, 둘의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아 우리는 회원카드를 구매했다. 2번만 와도 이득이었나? 암튼 그랬는데 우린 성북동 사는 동안 3번 갔던 걸로 기억한다. 갈 때마다 박물관 내부 전시도 조금씩 바뀜.

울창한 박물관 외부 정원과 위에서 내려다 본 서울풍경




더 많지만 이 정도 기록하기로.

꿀댕이랑 둘이서 주말을 보내는 날이면 자주 갔던 집 근처 산책길도 정말 좋았는데, 용기내서 조금 더 멀리 가 보지 못하고 계속 같은 루트로만  맴맴 돌았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아쉽다.

우리가 살던 곳 진짜 바로 옆에 있던 산책길, 지금보니 제법 많이 갔네.



나중에 꿀댕이도 많이 크고 경제적으로 더 여유가 생기면,

그리고 내가 드디어 장롱면허에서 탈출하게 된다면!

성북동으로 다시 돌아와 뷰가 좋은 주택에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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