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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Mar 24. 2023

상춘(賞春)

-매화를 보며

  땅두릅 농사 6년을 하다 보니 수확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썩은 뿌리가 늘고 줄기도 가늘어져 지난달에 밭 한 개를 갈아엎었다. 굴삭기로 긁어낸 뿌리를 한 곳에 모아 놓고, 작두로 뿌리 자르는 작업을 보름 가까이 이어갔다. 잘라낸 뿌리는 눈이 조금씩 트는 부위인지라 곧바로 텃밭에 파묻었다.

  

 작두질을 한 지 일주일 지날 무렵부터 새벽에 오른쪽 손바닥이 저려 단잠을 설쳤다. 연이은 강행군에 어깨, 팔꿈치, 허리까지 뻐근해 왔지만 농사라는 게 다 시기가 있는 법 아니던가. 사서 하는 고생이니 마음 추슬러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돌아온 그날, 집 옆의 화단에 가보고 싶었다. 이삼일 전 흰 매화가 조금씩 움이 트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오호! 어느새 가지마다 화사하게 만개한 게 아닌가. 우리 집 터줏대감 동백이야 연말연시 이미 선홍빛 꽃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청매, 백매 그리고 사과나무(홍옥)는 나목으로 덩그러니 존재했었는데, 그중 백매가 올봄 첫선을 보인 것이다.

     

 키우는 자식들도 그러하듯, 청매, 백매나 꽃잎은 희지만 조금씩 다르다. 나대지 않고 뒤에서 꽃잎을 붙잡아주는 것이 있으니 꽃받침이다. 그것이 연둣빛을 띠면 청매인데 봄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면, 주홍빛의 백매는  연정(戀情)을 불러일으켜 가슴 설레게 한다.    

  

 코를 꽃잎에 가까이해 봤다. 특유의 청고(淸高), 그윽한 향이 변연계 해마까지 밀려 들어와 뇌 전체로 싸하게 퍼져 나간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온몸이 매향으로 가득하고, 고단함은 눈 녹듯이 가라앉는.  

         

 며칠 뒤 백매가 꽃잎을 떨궈 새잎이 나기 시작하자, 게으른 청매가 그제야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른 봄 몸집이 불어나는 옆 백매를 위해 곁가지 몇 개를 잘라냈다. 그럼에도 싫은 내색 하지 않던, 수더분한 녀석이다.  

    

 포동포동 살이 찐 동박새 두세 마리가 청매 가지 끝에 앉아 장난치는 횟수가 잦았다. 그래서일까. 일찍이 꽃잎을 떨구어내니 건너편 사과나무가 잎부터 내밀며 화답한다. 홍옥은 애당초 꽃부터 피는 녀석이 아니다. 마지막 향연, 하얀 사과꽃을 좀 더 기다려볼 참이다.

      

 춘설이 내리면 가끔 볼 수 있었던 설중매(雪中). 이곳 남쪽 지방에서는 감히 바랄 수 없다. 일산에 살 때 그렇게도 많이 내리던 눈, 고향에 내려와 십 년을 살았지만 제대로 온 적이 없다.     

 

 오죽했으면 옛 선비들이 집안에 들여놓고 예찬했을까. 매화 집착이 빚어낸 결과물, 설중매 분재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작품 탄생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이종묵 교수도 예전에 언급한 바가 있다.    

  

 먼저 복숭아나 살구나무 고목을 찾아내서 그루터기와 뿌리 일부분만 남겨놓는다. 여기에다 봄이 오면 매화를 접붙인다. 가을에 화분에 담아 방안 아랫목에 놔두는데, 매합(梅閤)이라는 작은 감실에 안치한다. 매화는 한겨울, 봄인 줄 알고 꽃망울을 터뜨린다. 눈 내리는 창가에 두고 찬찬히 음미해 보는 것이 즐거움 중 하나다.   

       

 옛사람들의 호사를 어찌 바라겠는가. 약속이라도 하듯 시차를 두고 기어이 피여 내는 우리 집 꽃나무들. 상춘의 기쁨을 오롯이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사치스러울 뿐이다.

 동백나무속으로 숨었던 동박새들이 슬그머니 나와 지절 댄다. 한 놈이 청매로 날아들고, 얼마 남잖은 꽃잎들 속절없이 흩날리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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