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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Dec 06. 2022

이소

 이른 아침 우리 부부는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삼 년 가까운 세월을 유배 온 것처럼 고향에 갇혀 보냈다. 긴 은둔생활(?)에서 해배(解配)된 것은 다름 아닌 아들 덕이다. 여자 친구 부모와 상견례를 한다며 강남 한 식당을 예약해 놨는데, 노총각이 장가를 가기는 갈 모양이다.

     

 진주를 벗어나자 지리산 자락마다 단풍 향연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너무나 장엄하여 비장한 색조가 허허로운 가슴 언저리까지 밀려들었다. 바삭 말라버린 줄 알았던 여울이 일렁거린다.  

     

 아들을 이야기하자면 일산에 살던 시절로 거슬러가야 한다. 의정부 306 보충대까지 차로 데려온 우리는 차가운 스탠드에 앉아있었다. 연병장은 구름처럼 몰려든 장정들로 붐볐다. 흙바람이 이따금 불었지만 우리는 아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녀석의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이다. 내 품에서 내려 또래들과 줄지어 서 있던 모습, 불안하면서도 무척 대견스러웠다. 두 번째 우리 곁을 떠나려는 입영은 그래도 짧은 기간이다. 언젠가는 새 둥지를 찾아 나설 것이니, 그에 비하면 낫지 않냐 마음을 추슬렀던 때가 있었다.  

     

     

 예전 우리 주례 선생의 긴 덕담이 이젠 한 구절도 떠오르지 않는다. 누적된 스트레스에 수많은 하객들의 시선이 양어깨를 짓눌려서일까. 시대가 변하며 주례사는 짧아지고 이제는 아예 사라지는 추세다.

 내가 주례 나설 이유야 없겠지만, 아들과 예비 며느리에게 덕담이라도 해준다면 뭘까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퇴계선생의 일화가 어떨까?

     

 부부 불화로 노심초사하던 어느 제자가 퇴계를 방문 후 돌아갈 때, 길가다 혼자 뜯어보라며 편지를 주었다.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십 대 초반에 첫 부인을 만났으나 일찍 사별하고 삼십 대에 후처를 만났다. 살다 보니 인성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차마 인륜을 저버릴 수 없어 수십 년 번민을 견뎌내며 이 자리까지 왔다는 본인의 경험담이었다.

 덧붙여, 퇴계는 유교 경전(대학, 중용, 주역) 구절을 인용하면서 부부가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이 됨을 지적했다.

     

 제자는 크게 깨달아 부부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가내 화목을 되찾게 되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 부인은 남편 스승을 위해 심상(心喪) 삼 년의 옷을 입었다는 내용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퇴계 정신을 좀 더 들여다보면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부모, 자식 사이는 수직적 위계질서다. 이에 반해 남편, 아내 사이는 수평적 조화이면서 출산이 수반된다. 결국 인간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부부화합이 부모-자식 질서에 앞서는 것이고, 나아가 효도의 근간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과연 이 훈수(?)가 시의적절할까 의문표가 달렸다. ‘아빠! 무슨 케케묵은 이야기를 또 하세요.’, ‘어머! 우리 집 아빠처럼 걱정이 많으시네.’ 이런 말풍선들이 머리 위로 떠오른다.

   

 비로소 이소(離巢)하려는 의젓한 몸부림. 얼마 후면 푸르디푸른 창공을 향해 굳세게 도약할 것이다. 하늘은 늘 변화무상한 곳, 아비의 당부를 한 번씩 들춰봤으면 좋겠다.


 아내는 아까부터 말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한 여름  나며 제법 어엿해진 신록들. 엄동설한  고르기 위해 아낌없이 태워 온 산 물들이, 비켜 흐르는 강물은 불콰하게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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