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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Sep 03. 2018

34. 어린이 놀이헌장이 필요하다

36년 

1976년 5월 1일 육영재단에서 “영애 근혜 양”이 참석한 가운데 어린이 독서헌장 선포식이 열렸다. 1952년생이니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박근혜씨는 출판이나 도서관 관계자들에게 좋은 책을 많이 발간해 달라고 당부했다.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을 보니 국민학교 고학년에 재학 중일 법한 많은 어린이들의 뒷모습이 보이고 한 가운데에 젊디젊었던 박근혜 씨가 서있다. 영애라 불리던 청년이 (원고 작성중인 11월의) 유력 대선 후보가 되는 세월에 흰색 브라우스를 단정하게 받쳐 입은 20세기 소년 소녀들은 40대 중후반이 되었다. 그때 그 아이들이 남들과 비슷한 나이에 결혼해서 애를 낳았다면 당시와 비슷하거나 좀 더 나이가 많은 21세기 소년 소녀들과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36년 쯤 전이니 격세지감이 든다. 세월의 무상을 얘기하려 했던 건 아니다. 당일 선포식을 알리는 경향신문의 7면 기사 마지막을 인용하여 보자. “독서헌장 선포식에서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좋은 책을 읽어 마음의 양식을 장만한다」는 등 5개항의 독서헌장을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윤석중이 초안하고 이은상이 다듬었고 아직도 초등학교나 지역의 어린이 도서관에 걸려있는 이 헌장은 모든 항목이 다 이런 식이다. 「…… 참 지식을 만든다. ……  바른 마음을 갖는다. …… 자라며 삶의 힘을 기른다. …… 쓸모 있는 한국 사람이 된다.」 신문기사와 마찬가지로 어린이들이 주체가 되어 독서를 통해 바른 성장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전문을 살펴보면 말 자체로는 어른이 어린이에게 할 수도 있는 말이고 그렇게 틀린 말은 없다. 

문제는 당시의 국민학생들이 단지 다짐을 하는 수준에서 독서를 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불과 30여 년 전이지만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어린이 도서관은 종로구 사직동에 하나가 있었고 각급 학교의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는 곳이었을 뿐 책을 읽는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린이물의 경우 계몽사를 위시한 몇 곳의 출판사에서 일본의 고단샤 같은 곳에서 출판한 전집물을 삽화 뿐 아니라 판형째 베끼긴 했는데 비싸기는 상상을 초월했던 전집물이 대세였다. 따로 책을 빌려 볼 여건이 안 되었고 당시의 중산층이 장기할부로 구입하려해도 큰 맘을 먹어야 했다. 그러니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중반만 해도 어린이들이 읽을 법한 책을 갖추지 못한 집들이 오히려 많았다. 이러니 그 때 그 어린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은 요즘 어린이들에게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실컷 뛰어 놀라고 하는 말과 다름없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 


어린이 독서헌장과 현실 

그런 현실 속에서 어린이들이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만들고 선포한 어린이 독서헌장에는 어른들이 뭔가를 해주겠다는 내용이 단 하나도 없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책을 읽고 싶어도 읽을 만한 책을 일상에서 구하기 힘든 어린이들에게 ‘니가 마음의 양식, 참 지식, 바른 마음, 삶의 힘을 지니지 못한 쓸모 없는 한국 사람이 되면 그건 어른들이 책 읽으라고 할 때 니가 책을 안 읽었기 때문이야’라고 호통치는 것이 바로 어린이 독서헌장이었다. 도서관은 없고 책은 비싼데 아이들이 무슨 수로 책을 읽는단 말인가. 그래도 세월은 흘러 당시의 20세기 소년 소녀들이 어떻게든 무럭무럭 자라서 어린이들이 어려서 읽어도 좋고 어른이 되어 읽어도 좋을 법한 훌륭한 출판물만 추려도 서가에 넘치고 넘칠 만큼의 세상을 만드는데 손을 보태면서 30여 년이 지났다. 

이렇게 좋은 책이 한 권 한 권 늘어나 집의 서가와 학급문고와 학교도서관에 빽빽하게 꽂히는 동안, 시험공부하랴 선행학습하랴 학교숙제와 학원숙제하느라 평일에는 늦게까지 잠도 못자고 주말에는 체험학습하랴 틈틍이 카톡하고 게임하랴 왠만한 어른들보다 바쁜 요즘 아이들의 일상에는 책을 읽을 틈이 나지 않는다. 어쩌다 운이 좋아 자식의 (초등)학교 시험 성적에 대범한 예외적인 부모 밑에서 책을 꽤 많이 읽고 성장한다 해도 ‘쓸모 있는 한국 사람’이 되기는커녕 쓸모라고는 하나 없는 잉여 중의 잉여가 되기 십상인 세상이 되었다. 1976년에서 2012년으로 지나는 사이 풋풋한 아가씨가 원숙한 정치인이 되었고 세상은 어린이 서적의 불모지에서 어린이물의 천국이 되었지만 어린이 독서헌장은 극단에서 극단으로 공허하기 짝이 없다. 현실은 어린이 독서헌장이 파고들 틈이 전혀 없다. 우선 어른의 책임과 당위가 단 한 줄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헌장에는 어른 자체가 증발되어 있다. 

다섯 문장의 어린이 독서헌장은 한국사회의 고질병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책임지는 자, 즉 어른의 부재이다. 어린이에게 독서가 중요하다해서 만든 독서헌장에 어른은 어떤 작업을 해야 하고 어떤 책임을 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의 고민과 반성이 없다. 그저 어린이가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는 어른스러움이 도드라진다. 어른들은 어린이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에 관심이 없다. 시키면 그만이고 좋은 말 몇 마디면 그만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아동기에 상전벽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현실이 변했는데 헌장은 36년째 그대로이다. 어른들은 눈높이란 말을 학습지 판매에 사용할 뿐 어린이들에게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 지 헤아릴 능력도 깜냥도 없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듣기 좋은 말을 즐겨 하면서도 요즘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깊이 두루두루 아이들의 마음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살피는 작업이 드물다.  


어른이 할 일 

한국과 생활수준이 비슷하거나 좀더 나은 나라에서 어린이들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조사한 내용을 보면 압도적인 1위의 내용은 ‘집 근처에 사는 친구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놀면서 보내는 것’이다. 어른들은 좀 더 좋은 음식과 좀 더 비싼 의류와 좀 더 멀리 오래 가는 여행과 좀 더 질 좋은 교육을 어린이들에게 제공하고 싶어하고 그런 것을 원하는 아이들도 적지는 않다. 하지만 일정 수준의 발전과 성장을 이룬 사회환경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자유롭게 놀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어른들의 대응이 가장 이른 사회가 1938년의 덴마크로 플레이리더라는 직업을 만들어 아이들이 놀도록 도왔으며 모험놀이터를 만들었고 이 모델은 북유럽 전체로 퍼졌다.  

21세기 한국에서 성장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 있다면 바로 놀이이다. 부모세대와 비교해서 모든 것이 풍요롭지만 단 하나 부족한 것은 놀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이다. 학력저하니 공교육붕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현상이 일어난 시점은 공교롭게도 조기교육 붐으로 자유롭게 놀이하고 느긋하게 독서할 아동기를 학원과 학습지에 저당 잡힌 세대부터이다. 요즘 아이들은 뭐가 어떻고 하는 얘기들을 살피면 21세기 아동/청소년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 많다. 요즘 아이들을 탓하고 비난해 보았자 어른스럽지 못한 것은 36년 전이나 매한가지이다. 진짜 어른들은 남의 탓을 하지 않고 애써 책임을 진다. 학생 때 경쟁을 많이 해야 국가경쟁력이 커진다는 얘기도 남 탓하기 좋아하는 철부지들의 말이다. 

어른답게 책임을 지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어린이 놀이헌장을 만들어 아동/청소년들이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두면 우선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책임을 요구할테니 억지로라도 책임감을 가지게 될 것 이다. 1992년 제정되어 1998년 개정된 영국의 어린이 놀이헌장 10조 중 1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여 모두 어른의 책임과 할 일을 세심하게 규정한다.  “모든 어린이들은 놀이를 필요로 하며 놀 권리를 가진다. 모든 연령대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유롭고 자신있게 놀 수 있어야 한다.” 기실 한국인은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도 놀이가 고프다. 이 원고가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올 쯤이면 다음 5년의 임기를 새로이 시작하는 대통령이 이제 어린이들이 집 근처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세상에 대해서도 약간은 마음과 정성을 기울였으면 한다. 그리고 유권자라는 법적 기준으로 성인임을 인증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놀이가 무엇인지 놀고 싶어하는 마음을 다그치고 억누르면서 살아서 얻는 게 무엇인지 헤아리면 좋겠다. OECD 최장노동시간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이에 적응하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훈련이므로 어린이로서 놀고 싶은 마음과 놀 자유를 억누르면서도 너희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게 과연 어른이 할 일인지 잠시 숙고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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