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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Sep 03. 2018

35. 호모루덴스는 멸종하지 않아

어린이는 놀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이 필요하다. 놀이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Children need the freedom and time to play. Play is not a luxury. Play is a necessity. 

–– Kay Redfield Jamison. Contemporary American professor 


놀이는 무엇인가? 어린이는 어떤 존재인가? 아동기는 몸과 마음이 성숙한 성인이 되기 전에 거치는 단계나 준비기이며, 놀이는 그 과정에서 유용한 어떤 무엇인가? 유럽의 역사학자 호이징가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놀이이고 놀이라는 바탕 위에 인간의 문명이 세워졌다. 1938년 출판된 <호모 루덴스>에 이러한 통찰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아직도 통념상 놀이는 문화의 하위 영역이다. 개인의 삶에서 노동 또는 학업과 휴식의 사이에 겨우 존재하며 재미는 있지만 별다른 목적과 가치가 없는 활동이 바로 놀이이다. 통념은 힘이 세며 일정한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 우리는 분명 재미없이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은, 놀이가 그러하듯, 어떤 목적을 위하지 아니한다. 

누군가 와서 나에게 “놀이는 중요한가?”라 물으면 우선 ‘중요하다’라고 답할 듯하다. 그 사람이 “왜 놀이가 중요한가?”라 재차 물으면 ‘인간의 삶과 문화에서 놀이가 아닌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라 대답해 주겠다. “그런가?” ‘그렇다’ “그렇다면, 놀이가 아닌 것이 거의 없다면, 놀이가 과연 중요할 수 있는가?” ‘그렇다. 정녕 놀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놀이는 everything인 동시에 nothing인 그 무엇이다. 놀이는 매우 자명하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활동이지만, 아직은 인간의 언어로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복잡한 과정과 원리를 가진 실체이다. 놀이라는 일상 속의 복잡계를 이해하려면 양극단의 두 관점을 동시에 긍정해야 한다. 놀이라면 당연히 전래놀이라는 선명한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하면 그리 선명하지 않은 현실과 부합하기 어렵다. 

과연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놀지 않는가? 답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놀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우선 놀이는 자유일 수 있다. 놀이의 반대는 억압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어린이들은 내전을 겪고 있는 나라나 극히 빈곤한 나라의 아이들만큼 심각한 놀이실조 상태이다. 좋게 표현하자면 한국의 초등학생들은 오직 공부할 자유만 가지고 있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놀이는 성인기의 준비로 볼 수 있다. ‘어려서 놀며 길렀던 힘’으로 ‘세상의 벽과 사회에서 받을 상처’를 넘거나 치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과 들과 골목을 뛰어다녀야 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공부나 독서도 놀이가 된다. 21세기 아이들이나 옛날의 아이들이나 모두 365일 24시간 중에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놀이를 한 셈이다. 농경사회, 수렵사회, 산업사회, 후기산업사회 등등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시대와 사회가 달라지면 놀이도 달라지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초등학생들이 미래를 대비하여 잘 놀면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최근 서울시 초등학교 중 일부가 휴식시간을 10분에서 5분으로 줄이고 점심시간도 줄여서 결국 하교시간을 앞당겼다. 학원에 가건 방과후학교에 남건 아이들이 공부할 시간을 하루 30분이라도 늘여주어야겠다는 갸륵한 뜻을 품은 교장들이 그리 많다는 것이다. 그 정도는 약과다. 전국의 초등학교들이 수학과 영어 교과 시수는 늘렸고 체육 교과 시수는 줄였다.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갈 인재들은 체력이 약해져도 되지만 영수실력이 중요하다는 깊은 뜻이다. 이 깊고 갸륵한 뜻을 이해 못한 네티즌들이 수천 수백의 댓글로 비난을 퍼부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초등학생들이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건데, 두 부류 중 아이들에게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는 쪽이 다수인 듯하다. 그러나 2008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돌이켜보면 경쟁교육을 강조하는 보수 진영 후보들이 얻은 표가 진보 진영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현실에 영향을 줄 만한 논의를 하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냉철하게 보아야 한다. 현재 어린이들의 삶이 안쓰럽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아이들을 위해 약간이라도 성가신 일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시험을 보면서 더욱 학업에 힘써야 한다고 실제로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이들이 정작 세상을 조물락거린다. 어느 쪽을 향해서건 ‘놀이는 밥이고, 놀이밥을 굶다보면 아이들이 멸종한다’고 다그쳐선 곤란하다.  

우선 효용이 없다. ‘아이들의 멸종’ ‘참극’ ‘전쟁’ 등 묵시론적 언어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주긴 커녕 반감만 주기 쉽다. 당위를 강조하는 말이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없다. 두 번째로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현재 20대들의 문화를 보면 과거 어떤 세대보다 유희성이 강하다. 이들 역시 어려서 ‘놀이밥을 굶어가며 매일 전쟁’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낸 ‘멸종된 아이’ 시대와 20대 문화의 유희성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호모 루덴스의 아이들은 결코 멸종하지 않는다. 놀이는 인간의 본질이기에 아이들은 어떻게든 놀이하기 마련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놀이는 전자매체를 활용한다. IT환경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나라답게 전자매체놀이라는 도래종 놀이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전래놀이는 멸종하다시피 했다. 다른 나라를 보면 한국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옛놀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어느 나라나 놀이생태계에 천이(遷移)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놀이는 재미있고 몰입이 가능한 활동이다. 놀이의 우열은 없지만 재미로 따지자면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며 다양한 서사와 음향과 화면으로 몰입도를 높인 전자매체 놀이를 넘어설 옛놀이는 없다. 게다가 놀이와 사회는 조응한다. 하나의 사회구조는 어떤 특성을 가진 놀이를 낳고 그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생활감정과 생활공간에 맞는 놀이가 널리 퍼지도록 되어있다. 전자매체놀이는 현대사회와 긴밀하게 조응한다. 먼저 미션이 주어진다. 적들을 궤멸시키든, 공주를 구하든 뭔가 임무가 주어진다. 임무 수행중 모험을 하면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성과가 누적되면 레벨치가 오른다. 레벨치란 그야말로 노골적인 순위 매기기다. 비교가 이보다 간명해지긴 어렵다. 이러한 게임의 구조는 현대인의 삶의 구조와 거울상처럼 맞아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안타깝긴 하지만 이것이 놀이의 시대성이다.  

어린이들이 게임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일까? 엄밀히 따져 말하자면 게임이 약간의 문제를 일으킬 순 있지만 게임 때문에 사람이 망가지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전자매체 놀이 말고는 옵션이 없는 현실이다. 약간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이 잘 뛰어 놀지 못해서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없도록 만드는 구조가 우리 모두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문제이다. 막말로 80년대 초반처럼 전두환식의 과외금지를 지금 시행한다면 일단 대학이 붕괴한다. 대졸자를 가장 많이 흡수하는 영역은 바로 수험산업(사교육)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마음껏 놀게 되면 학원과 학습지, 출판사 등등 당장 굶어야 할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아이들의 일상을 빽빽하게 채우지 못하면 거리는 실업자로 그득하게 된다. 현실은 복잡하며 강고하다.  

그런데 아이들을 온갖 과제와 수업으로 옥죄는 젊은이들은 마음이 편할까? 학원에 다니느라 마음껏 놀지 못했을 소년기를 보낸 청년들 중에는 보람없는 수험산업의 공갈협박범과 간수로 일하느니, 아이들과 마음껏 놀면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면 이를 선택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어린이놀이운동을 위해서도 주체가 끊이지 않고 재생산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플레이리더를 안정적인 사회적 일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자본제와의 싸움이라면 10년, 20년으로 끝나지 않는다. 플레이리더들이 수 십명 수 백명이 되면 수백 수천의 대안이 생겨날 것이다. 지금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여러 조건을 세팅하는 일이다.  또한 어떤 놀이들이 어째서 아직 대도시 아이들의 일상 속에 살아남았는지 따져야 한다. 무작정 모여서 재미있게 노는 일이 일어날 리는 없으며 여러 사람이 모여 몸을 움직여 노는 놀이가 다 같지도 않다. 근대 스포츠의 동작은 균질한 호흡과 규율과 리듬으로 우리 몸을 움직인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그저 뜀뛰기만 하던 아이들은 몸을 놀려 뛰어 노는 것이 얼마나 큼 기쁨을 주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원시적 생명력을 가진 놀이들은 폭발적인 리듬을 통해 행복감과 충만이 풍부한 결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신명과 흥이라는 ‘파이디아’의 원초적 정서와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놀이들이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이런 놀이를 함께 나눌 것인지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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