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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수 Jan 10. 2021

미스터 혹은 미스 쇼미더머니

트로트와 힙합 그리고 가족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족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가 더 정확하다. 거실을 중심으로 나눠진 집의 구조는 분리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코로나 이전의 내 방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한 역할만을 충실히 했었다면 이제는 수면뿐 아니라 작업을 비롯한 많은 역할을 해결해줘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코로나가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책상을 바꾸고 의자를 새로 샀다. 빈 벽에 그림을 걸고 작은 책장에 평소 아끼는 책들을 가득 채워두었다. 나의 공간은 집이 아닌 방이 되었다. 공간 효율을 극대화한 가구 배치에 이케아 감성을 살짝 넣어두고 책 몇 권 쌓인 것으로 방은 나의 쓸모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리고 방의 쓸모는 나를 가뒀다. 




 거실에 잘 나가지 않았다. 내가 요즘 마주치는 거실의 풍경은 미스터(미스) 트롯을 보는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솔직한 마음으로 화가 났다.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트로트 프로그램을 보는 것에서 낙을 찾는 중년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서로 다른 삶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만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거실의 적막이 싫었다. 비어있는 집에서 보지도 않는 티비를 틀어놓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 혼자 밥을 먹을 때도 굳이 티비를 틀지 않았다. 이제는 소음보다는 적막이 좋았다.


  TV를 잘 보지 않지만 유일하게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우습게도 '쇼미더머니'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시즌 1부터 지금까지 모든 시즌을 다 챙겨봤다. 수험생 시절에도 쇼미더머니는 챙겨봤다. 


 사람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버티게 한 음악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리쌍'과 '에픽하이'와 '브로콜리 너마저'가 있었다. 그리고  매해의 순간순간 즐거움을 주었던 쇼미더머니가 그것이다. 어떤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좋았다.


  쇼미더머니를 보던 나를 바라보는 당신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폭력과 욕설이 가득한 가사들을 보고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심정은 무엇일까. 당신들은 이 음악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음악을 듣는 나를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일까.


 돌이켜보면 당신들은 단 한 번도 내가 좋다고 하는 일을 막은 적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들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어느 순간에 봐도 내가 생각하고 기억했던 모습보다 늙어있을 테니까. 내가 먹은 나이만큼 당신들도 나이가 들었다. 그 사실을 알아서 무서웠다. 


 지금 시대의 성취를 IMF 시대 때 패배한 가부장제가 만든 사회라고 비꼬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 세대를 인정하기 싫었다. 그들이 만든 학벌주의가 싫었고 군대식 조직 문화가 싫었고 유교적 잔재가 다 싫었다. 어쩌면 나는 나의 실패를 그들의 책임으로 탓하고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유신정권을 겪으며 자라고, 87년 민주화 운동을 마주했으며, 학생 운동 시절에 학생이었고, 폭력이 당연시되는 시대의 군대를 다녀왔고, 졸업 후 96년 연세대 사태로 쇠퇴하는 학생 운동을 지켜보았고, 이듬해 IMF를 겪었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거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어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다시 보고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거고

 대구 지하철이 불타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또 보고 이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몇 년 뒤 용산 참사 현장에 불타 죽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 수많은 학생들이 바다에 가라앉아 죽은 사건을 겪었다.

 그 당시 죽은 아이들의 나이는 당신들 자녀 또래였다.

 

 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참사와 죽음을 목격한 당신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수 없는 바람들이 또 무너지고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어땠을까. 폭력과 죽음에 익숙해지지 않고는 살 수 있는 시대였을까. 이 또한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내가 감히 당신들이 목격한 죽음과 비극에 대해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글로만 읽고 TV로만 본 것을 당신들을 경험했는데


 우리의 선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내가 기억하는 당신들은 모습보다 훨씬 긴 시간을 당신들은 살아냈다.




 트로트를 좋아하는 당신들을 이제는 이해한다는 문장을 적으면 그건 거짓말이다. 쇼미더머니를 보는 나의 마음과 미스트롯을 보는 당신들의 마음은 같을까. 내가 느끼는 폭력과 당신들이 느끼는 폭력은 같을까. 지금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당신들은 내가 살지 않은 시대까지 살았다.


 가족의 무기력을 보는 것은 스스로의 무기력을 감당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그들의 음악에서 무기력만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해되지 않다는 말을 반복해도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중략)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252p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시간만큼을 더 살아도 지금의 당신들의 나이가 되지 못한다. 언젠간 시간이 더 흘러 내가 지금 당신들의 나이가 된다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올까. 그 순간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을 혹시 당신들이 이미 겪었나 궁금해도 과연 물어볼 수 있을까.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


 나는 당신들에게 분명 좋은 아들이 아니었는데

 다시 생각해도 당신들은 내가 좋다고 하는 일들은 막지 않았다.


 어쩌면 이 글을 그걸 이해해보고자 쓰기 시작했는데

 이 글을 다 쓴 지금도 나는 답을 모르겠다.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거나 당신들이 사실은 좋은 사람이거나 

 가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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