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 될 때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은 많은 경우 다르다. 우리가 선택하는 전공 혹은 직업에서 괴리감이 발생하는 많은 이유가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동일한 것은 행복의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것과 잘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은 또 묘하게 다르다.
나는 후회를 잘한다. 술자리에서 대화의 주된 주제는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이다. 후회는 단순하지 않다. 후회에도 여러 영역이 있다. 내가 이미 한 것에 대한 후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하면 안 되었던 것에 대한 후회. 이 넓고 다양한 후회 속에서 나의 지난 선택들을 끊임없이 탓한다.
지난 일기를 꺼내 봤다. 그 속에는 많은 후회를 적어 났을 줄 알았다. 일기 속에는 참 많은 다짐들이 적혀 있었다. 그 다짐들은 물론 지금 후회가 되었겠지만, 후회를 하기에 많은 다짐을 했다. 후회가 어쩌면 나에게는 삶의 동력이 되었구나 싶었다. 나의 글은 항상 지나간 것에 대해 쓴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사실 글이란 그 자체로 꽤나 긴 시간을 엮어 주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지금 지나간 글에 대한 글을 써보려 한다.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글을 썼지만 하나의 문장이 끝났을 때 그 문장이 영원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모국어를 좋아한다. 글을 쓰는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기보다는 한국어로 완성된 문장이 좋다. 완성된 문장에는 많은 고민이 베여있다. 어떤 단어를 쓸지 어떤 부사를 사용할지 어떤 순간에 마침표를 찍을지. 그래서 고민이 담긴 문장은 아름답다. 글을 읽다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때 우리는 멈추게 된다. 전시를 관람하던 중 어떤 강렬한 작품 앞에서 멈추는 것과 같다. 모국어인 한국어는 특히 그런 아름다운 지점이 많다.
아일랜드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일본인 친구가 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그 친구를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I Love You’라는 문장을 ‘달이 참 예쁘네요’로 번역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친구는 일본어 원문장에는 ‘참’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일본어 문장은 ‘츠키가 키레데스네’이다. (나는 히라가나를 비롯한 일본어를 전혀 알지 못하기에 일본어 표현은 한국어 발음 표기로 대체한다). 일본어 원문장을 그대로 직역을 하면 ‘달이 예쁘네요’이다.
‘I Love You’를 번역한 나쓰메 소세키보다 이 말을 한국어로 번역한 누군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하고 싶다. ‘달이 예쁘네요’와 ‘달이 참 예쁘네요’는 참 다르다. ‘정말’ ‘매우’ ‘많이’와 같은 여러 단어 중에서 하필 ‘참’을 선택했다는 것이 참 좋다. 저 순간, 저 이야기 속에서 과연 ‘참’을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참’이라는 한 글자 덕에 이 문장 앞에 멈출 수 있었다. 모국어로 쓴 글을 읽는 즐거움 이런 것 같다.
오랜만에 쓴 글이 힘이 되었다
내가 쓰는 글들은 거의 항상 부정적이지만
대체로 다 살아보자고 쓰는 것들이다
나는 글을 좋아하고 후회를 잘한다. 그래서 나는 후회를 참 잘하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경계 어딘가에서 나는 일기를 썼다. 내가 좀 많이 행복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았을 것 같다. 지나간 글을 꺼내어 또 다른 글을 쓰는 게 미련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나는 또 다른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다짐을 하는 걸 보니 나는 아직 삶의 의지가 있나 보다. 이 글을 좋아해 주는 누군가 있다면 당신도 후회를 참 잘하는 사람일 것 같다.
후회를 참 잘하는 당신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참 잘 살았으면 한다.
글을 쓰는 마음과 글을 읽는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고 싶다.
후회를 하던 마음과 다짐을 하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