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수 Feb 11. 2020

오슬로, 미래 도시 이야기

미래 도시 그리고 자연과 재료 이야기

첫 번째 수능이 끝나고 처음으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처음 빌린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물론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처음 읽는 책에 의지가 생기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대출 연장과 연체를 반복한 끝에 결국 다 읽지 못한 채 반납했다. 그 후 몇 년이 더 지나서야 ‘노르웨이의 숲’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노르웨이의 숲’을 인상 깊게 읽지 않았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은 제목과 다르게 노르웨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소설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지도 않고 ‘노르웨이의 숲’이 흥미롭지도 않았지만 그냥 언젠가 노르웨이를 가고 싶었다. 왜 하필 노르웨이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없었다. 가끔은 이유가 필요 없는 선택이 있다.


노르웨이를 떠나기 전 찾아본 정보에 의하면 북유럽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물가도 비싼 동네지만 막상 가면 볼 것도 할 것도 없다는 후기들이 후회를 자극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북쪽으로 넘어가 오로라 투어를 도전해 볼까 했지만 비행기 값과 투어 비용을 합친 비용으로 다른 국가를 여행하기 충분할 정도의 금액이었기에 바로 포기했다. 이유도 계획도 넉넉한 돈도 없이 출발한 여행이었다. 그렇게 떠난 노르웨이의 오슬로는 내가 겪은 유럽의 도시 중에서 최고의 도시로 남았다.


미래 도시 오슬로,

부와 여유를 즐길  아는 사람들

유럽의 대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종종 그 나라 특유의 색이 느껴지지 않고 그냥 전부 ‘유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유럽은 어디 가나 다 비슷하구나 싶은 거다. 하지만 오슬로에는 오슬로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단지 유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슬로는 분명한 대도시이다. 대도시의 풍경은 종종 지금 이 순간, 현재를 비추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대도시의 풍경이 질려 사람들은 주로 근교 소도시로 떠나 과거의 향수를 느끼고 싶어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소도시에서 더 큰 감명을 얻는다. 어쩌면 나 역시 비슷했다. 그래서 대도시 여행을 선호하지 않았다. 도시의 현재성이 크게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슬로는 현재의 시간에 멈춰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오슬로의 풍경은 먼 미래처럼 보였다. 미래의 도시를 그리고 유럽이 아닌 노르웨이를 나는 걷고 있었다.


오슬로 대표 건축물 오페라 하우스

빙하를 형상화 한 노르웨이의 대표 건축물 오페라 하우스는 그 모습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를 자유롭게 걸어서 돌아볼 수 있었다. 날씨에 따라서 그리고 시간에 따라서 보이는 오페라 하우스의 모습은 하나같이 새로웠다. 시내와의 접근성도 좋았기에 여행을 하는 중 매일 오페라 하우스를 보러 갔다. 인간이 만든 건축 예술의 절정을 아낌없이 걸을 수 있고 모두에게 자유롭게 개방된 모습에서 노르웨이의 여유로움을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가진 사람을 의심하고
우리보다 덜 가진 사람을 무시한다
‘열심히 살다’와 ‘잘 살다’는 같은 것일까


노르웨이는 본인들이 가진 자원과 부를 이용할 줄 아는 나라다. 그들의 여유는 애써 아끼지 않음에서 나온다. 낭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수저 계급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부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성공을 떠올리기보다는 그 이면의 추함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동정을 가장한 불필요한 연민을 풍기며 옹졸하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끊임없는 비교와 의심 속에 여유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노르웨이는 소득에 비례하는 세금의 비율이 높아 직업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소득 격차가 심하지 않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높은 세금으로 인해 그들이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경쟁 사회에 사는 사람들일 것만 같다.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다가 아닌 굳이 너무 열심히 살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우리는 ‘열심히 살다’와 ‘잘 살다’를 구분하지 못한다. 열심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잘 살기 위해서는 열심히 해야만 하는가. 애쓰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것이 더 이상적이 않은가.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비난은 결국 스스로 여유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슬로 패스와 오슬로의 야경

물가가 비싼 오슬로에서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다니기 위해 오슬로 패스를 구입했다. 여러 박물관 무료입장과 교통 패스는 물론 몇몇 음식점도 할인해주는 오슬로 패스는 단기 여행객에게 합리적인 선택지다. 나는 이 오슬로 패스에 크게 놀랐는데 이건 혜택 때문이 아니다. 오슬로 패스는 구입을 한 시점이 아닌 사용을 한 시점으로부터 48시간이 계산된다. 다른 유럽권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펀칭 기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슬로 패스의 시작 시간은 본인 스스로가 펜으로 패스권에 표시하면 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오슬로 패스권을 가지고 있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아무도 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식당에서 할인받기 위해 오슬로 패스로 할인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패스권을 보여달라고 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는 대답과 함께 영수증에 할인된 가격으로 표시해서 준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이런 행동은 사람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 여유로부터 나온다.


북유럽 감성 하면 떠오르는 주황빛 가득한 설원 속 주택들의 야경 역시 그들의 여유를 반영한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더블린은 높은 전기세로 인해 밤에도 최소한의 불빛만을 켜 두고 생활하는 집들이 많다. 하지만 오슬로에서 본 풍경은 저녁에도 집 안 가득 불빛을 가득하다. 불 빛 가득한 풍경이 결코 낭비로 느껴지지 않는다. 북유럽의 한파를 이겨낸 그들의 승리의 여유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추운 나라가 이렇게 따듯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들의 부가 아닌 여유에서 온다.


미니멀리즘, 도시의 디자인

오슬로가 미래의 도시로 느껴지는 이유에는 도시 특유의 디자인 감성이 있다. 알다시피 노르웨이는 바이킹의 후손이다. 흔히 바이킹을 떠올리면 약탈의 이미지를 연결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것은 미디어의 일방적 주입이 만든 편견이다. 바다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그들은 다양성에 대한 가치관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유목 민족 사회가 농경 민족보다 다양성의 가치가 높았다고 한다. 그들의 정복은 통치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거대한 제국들이 몰락한 이유는 그들은 통치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바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바이킹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채우기보다는 버리기였을 것이다. 무한정으로 물건을 싣을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은 채우기보다는 버리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끝임 없는 이동과 드넓은 바다에 있어서 그들은 필요 없는 물건은 그냥 쉽게 바다로 던져버리면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 생존을 위한 경험에서 최소함의 가치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하기 위해 그들은 배를 만들어야만 했다. 거친 바다에서 버틸 수 있는 배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곡선을 연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바다의 물결과 바다에서 보이는 많은 풍경들이 이미 충분히 곡선의 형태를 그들에게 선물했을 것이다.


이들의 미니멀리즘은 역사와 환경으로 축적된 그들의 자연적 감각인 것이다. 곡선의 부드러운 아름다움과 과하지 않으면서 단순하지만 독창적인 색감과 형태가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오슬로 중심 시가지의 풍경, 건축에도 미니멀리즘이 묻어있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디자인 편집샵들도 하나같이 작은 미술관 갤러리를 보는 것 같다. 패션부터 가구와 소품들까지 그들의 미니멀리즘한 감성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우연히 디자인샵에서 발견한 옷걸이 조차 평범하지 않다. 나는 이들의 디자인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이지 않을까. 그들의 가격이 비싼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만큼의 여유와 디자인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 같은 여행객에게는 서러운 사실이지만 노르웨이의 디자인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내에서 만나게 되는 디자인 편집샵들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미래 도서관

여행을 하며 꼭 그 나라의 서점을 들리고는 한다. 어느 동네든 꽃가게와 책가게는 참 친절하다. 책을 구경하다 서점 직원을 통해 미래 도서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예전에 한번 기사를 읽은 적은 있지만 사실 그 위치가 오슬로인 줄은 몰랐다. 여행 중 만나는 사소한 우연과 인연들이 여행의 가치와 설렘을 더해준다. 미래 도서관의 위치는 원래 계획을 했던 오슬로의 송스반 호수 바로 옆에 있었다. 트래킹 하다 보면 미래 도서관에 닿을 수 있는 위치였다. 망설임 없이 하루를 그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미래 도서관은 노르웨이 공공 예술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매년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2114년 미래의 공개될 미공개 작품을 숲에 묻는 100년 장기 프로젝트이다. 한국 작가로는 한강 작가가 참여했다. 물론 100년 뒤 공개될 작품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 예술 프로젝트가 이뤄지는 공간을 가고 싶었다.


미래 도서관과 송스반 호수

숲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미래 도서관을 찾아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눈이 생각보다 많이 쌓였고 그 눈길을 적지 않은 시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눈길 쌓인 노르웨이의 숲을 걷는 일은 하나의 거대한 여행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정말 지극히 노르웨이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어떤 특별함을 말해야 하고 무엇이 노르웨이적인지 설명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분명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 도서관을 향하면서 이 공공 프로젝트의 가치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다. 눈길에 남는 발자국이 의미를 더해주는 여정이었다. 아쉽게도 미래 도서관 그 자체의 풍경은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다. 표지판이 없었다면 이곳이 미래 도서관인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 도서관을 만나는 순간이 아닌 미래 도서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목적을 찾을 수 있었다.


미래의 쓸모는
확률이 아닌 가능성의 영역이다


우리는 항상 막연한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한다. 그리고 불안과 공포는 쉽게 혐오로 바뀌고 누군가를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래라는 것은 그런 확률에 기대는 영역이 아니다. 미래 도서관의 참여한 작가들은 100년 뒤 자기가 죽고 난 후 자신의 글을 읽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그들이 글을 쓰는 마음은 100년 뒤 사람들이 살아 있을지 인류가 존재할지에 대한 작은 확률의 불안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글을 쓴다. 그 가능성의 영역에는 의심이 아닌 희망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미래의 공개될 한강 작가의 작품 제목은 ‘사랑하는, 아들에게’이다. 나는 소설의 제목만으로 겨우 그 이야기를 지레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책이 품고 있는 희망의 가능성이 미래의 쓸모를 말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재료 이야기, 정복의 가치

노르웨이의 음식을 하면 대부분이 연어를 떠올린다. 실제로 어느 식당에서나 연어를 재료로 한 음식을 찾을 수 있다. 노르웨이 연어가 지구에서 가장 좋다. 나는 이 명제가 참 마음에 든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작은 행성이지만 이 작은 행성을 죽기 전에 한 개인이 다 돌아보지 못한다. 지구는 인간에는 충분히 큰 행성이다. 이렇게 충분히 큰 공간과 대부분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수많은 나라와 대륙을 헤엄치는 연어가 있을 텐데 그중에서도 특히 노르웨이의 연어가 ‘제일’ 좋다는 이 말의 사실이 좋다. 마치 올림픽 신기록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람, 지구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를 들어 올린 사람, 지구에서 가장 정확한 사람처럼 노르웨이 연어는 지구에서 제일 맛있다. 전문적인 미식가가 아닌 나에게는 노르웨이 연어 맛의 특별함을 구분하기란 어렵지만 이 사실을 즐기며 먹는 연어는 행복했다.


연어와 고래 요리

노르웨이에는 연어 말고도 다른 나라에서 접하기 힘든 이색적인 요리 재료가 많다. 그중 대표적으로 고래와 순록이 있다. 사소하지만 재미있던 점은 메뉴판에 고래가 FISH가 아닌 MEAT로 분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래는 포유류에 속하는 동물이므로 당연한 분류지만 고래 고기를 처음 접하는 나에게는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고래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운다면 고래 고기는 익숙한 육류의 질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고기 특유의 향이 감돌았지만 식당의 실력이 훌륭했기에 비릿하거나 기분 나쁜 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 가지 불편했던 점은 고래를 식용으로 먹어도 되는가에 대한 불편한 의문과 고민이었다.


노르웨이는 세계적인 포경 국가 중 하나이다. 그리고 무분별한 고래 사냥으로 Norway, NO Way라는 고래 사냥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고래뿐만 아니라 순록 역시 인간이 사냥을 통해 식용으로 소비해도 되는 건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연어는 먹어도 괜찮으면서 고래는 왜 안되는지 음식에 들어있는 도덕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고래가 단지 연어보다 커서인지 고래는 양식을 할 수 없어서 인지 순록은 돼지나 소보다 더 특별하게 생겨서 인지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래뿐만 아니라 노르웨이의 연어 양식 과정에서도 인간의 정복성이 그대로 느껴졌다. 노르웨이의 연어 양식 방법은 매우 과학적이다. 즉 연어 양식은 과학적으로 인간에 의해 모든 것이 조절된다. 연어의 알을 부화하는 모습은 소설 ‘멋진 신세계’ 배양 장면이 겹쳐진다. 그리고 성체가 된 연어의 고기의 질을 올리고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해류는 연어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데 이 모습이 흡사 한 지옥의 풍경이 연상되어 소름이 돋기도 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 정해져 인간에 의해 똑같은 생을 사는 연어와 자연에서 태어나 인간에게 잡혀 자신의 삶을 다 채우지 못하고 식용으로 소비되어 버리는 고래와 순록 같은 동물들의 간극을 떠올려본다. 그 둘의 죽음은 닮은 듯하면서 그들의 삶의 비극은 묘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무엇이 더 불행한지 그리고 그들의 삶의 감정을 이입하며 얘기하는 것도 너무나 인간 중심적인 폭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연어와 고래를 먹은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가식적이다. 우선은 도덕적 판단을 미뤄야겠다.




오슬로의 아침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노르웨이는 그들이 정복한 역사와 문화와 자연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들의 여유에서 존경해야 할 점이 참 많다. 그리고 여유 넘어 숨은 정복 이면의 책임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겠다. 하지만 오슬로의 모습이 부러운 것은 그들의 정복의 이미지에 있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인간의 무지함이 때로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미래로의 발걸음은 공존과 정복의 갈등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희망의 가치는 정복을 정복한 공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결론을 내려본다. 오슬로를 돌아보는 지금도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더블린의 아침 식사 - 아침을 먹기 위한 아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