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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수 Apr 02. 2022

입지 않을 과잠바를 버렸습니다.

졸업 일기, 3월 편

계절이 바뀔 때 옷장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긴 건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당연히 더 이상 키가 크지 않을뿐더러, 체중의 변화도 없어 왔습니다. 옷이 맞지 않다거나 하는 물리적인 이유로 옷을 버리지 않으니 지난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습니다. 옷을 버린다는 건 이제 오로지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옷 하나하나에 기억이 묻은 것마냥 괜스레 의미를 부여하며 버리기를 아까워했습니다.


어느덧 붙박이장이 가득 찼습니다. 날씨가 풀려 이번 겨울에 새로 산 옷을 정리하려고 보니 공간이 빡빡했습니다. 부피를 가득 차지하고 있는 지난겨울 겉옷들이 문제였습니다. 그중 유독 크고 두껍고 따듯한 패딩이 하나 있었습니다. 신입생 시절 입고 다녔던 과잠바였습니다. 그때는 참으로 유용했는데 지금은 다시는 입을 일 없는, 더 이상 쓸모없는 옷이 되었습니다.


쓸모의 이유는 물론 기능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쓸모라는 단어가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도톰하게 솜이 찬 옷은 지금도 겨울 촬영에 입기 제법 괜찮아 보였습니다. 문제는 옷 뒷면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학과 로고였습니다. 그 이유 하나로 더 이상 저의 옷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실 이 옷을 아직도 제 옷이라 여기며 입고 다닐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다시 입을 일이 없을 과잠바에 의미가 쌓이는 게 싫어 옷장 대신 헌옷수거함에 넣었습니다.


패션에 관심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옷에 항상 신경이 쓰이곤 합니다. 결국 옷도 보여지는 것이기에 저의 일과 닮아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촬영을 할 때의 옷과 일상의 옷을 구분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만날 때와 어색한 사람들을 만날 때의 옷을 조금은 다르게 입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번거롭고 또 돈도 많이 드는 일이기에 어느 상황에서나 입을 경계 없는 무난한 옷들을 삽니다. 화려하지 않고 적당히 단정하고 편하지만 튀지 않은 옷들만이 제 옷장에 있습니다. 결국 옷이 사람을 닮는 건지 사람이 옷을 닮는 건지 제가 산 옷들처럼 저는 적당히 무난하고 모나지 않은 사람으로 여러 집단에 섞여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새로이 직장을 구했습니다. 회사는 복장 규정이 전혀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옷을 입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을 매일 만날 일 없었던 제가 규칙적인 출퇴근을 하게 되니 매일 달라져야 하는 옷에 신경이 쓰이긴 했습니다.


그날도 무난히 검은색 옷을 걸치고 회사를 갔습니다. 점심시간에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는데 직장 동료가 웃으며 어쩜 모두가 칙칙하게 검은색 옷만 입고 있냐고 말했습니다. 그날만의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대체로 검은색의 옷만을 입는 사람들의 태도가 재미있었습니다.


"당신은 왜 항상 검은 옷만 입나요?"
"이것은 내 인생의 상복이에요. 전 불행하니까요."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물론 저희의 삶은 희곡과 다르기에 우리가 검은 옷을 입는 것에는 불행도 특별한 의미도 없습니다. 구태여 의미를 찾는다면 의미 없는 것이 그 자체로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 너무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에 지쳐서  옷에 있어서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의 이미지에 어떠한 상징도 두려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의미를 지우는 것에도 참 부단한 노력이 드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검은 옷을 즐겨 입는 저는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합니다. 요즘 날씨가 풀려 봄이 시작되려 하자 1년의 시작이 왜 봄으로 시작하지 않고 겨울로 시작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생각했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봄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새로운 시작 전에는 충분한 연습이 필요해서인 거 같았습니다. 이제야 진짜 22년이 시작되는 기분입니다. 마음을 다잡을 겨울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내일부터 날씨가 더 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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