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수 Jun 09. 2023

<인어공주>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영화

우리의 기억 속 최초의 영화는 무엇일까.


우리가 처음 보게 되는 영화는 높은 확률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영화를 접하게 되는 나이는 아마 유아기일 테니까. 유아기에 처음 영화를 본다고 했을 , 영화의 선택권은 아이가 아닌 부모에게 있다. 인어공주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질문은 먼저 하고자 한다.


당신이 부모라면 아이에게 어떤 영화를 보여줄 것인가.

당신의 부모는 당신에게 어떤 영화를 보여주었는가.


나의 기억의 끝자락에 위치한 영화 중엔 <토이 스토리>가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토이 스토리>는 카우보이 우디와 우주비행사 버즈의 우정과 모험을 다룬다. 어린 시절 나에게 카우보이와 우주비행사는 친구이자 영웅이고 또 꿈이었다.

 

<토이스토리> 속 우디와 버즈


그렇다. 내가 만난 첫 번째 카우보이가 바로 우디이다.


할리우드는 영화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서부극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많은 경우 카우보이가 등장했다. 그동안 할리우드가 그려온 카우보이도 우디처럼 우리의 친구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카우보이는 무법자이며 학살자이다. 수정주의 서부극이 등장하기 이전 서부극에서 카우보이들은 인디언을 가차 없이 죽였다. 그 영화 속 카우보이는 내가 아는 카우보이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윗세대에게 우디는 그들이 아는 카우보이가 아닐 것이다.


우디는 지금까지 서부극에서 묘사되었던 카우보이의 폭력 양상을 거부한다.  <토이 스토리>는 기성 영화가 지닌 폭력의 사슬을 끊어낸다. 이 영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인디언을 학살하는 카우보이를 긍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토이스토리>가 카우보이의 폭력을 미화하는 영화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어공주>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인어공주


'내가 아는 애리얼이 아니다.'


<인어공주>를 향한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애리얼은 빨간 머리의 하얀 피부를 한 인어가 맞다. 적어도 지금의 <인어공주>가 최초의 영화가 아닌 우리들에게는 분명 그렇다. 그러나 우리 다음 세대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어공주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할리 베일리가 인어공주가 될 자격이 없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할리 베일리가 공주라는 것 자체에 불만을 가진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그 이전에 공주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런 자격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성 영화들이 으레 표현해 온 양식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의 애리얼은 누군가의 기억 속 애리얼과 다를 뿐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결국 다름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내가 아는 애리얼이 아니다.'라는 말은 결국 다름을 향한 거부이다. 비난을 하는 이들은 유년의 추억을 방패 삼아 본인들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흑인이라 싫어하는 게 아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름을 향한 차별적인 태도는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가 반복해 온 폭력과 학살에는 언제나 '다름을 향한 거부'가 전제되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더라도, 뭐가 잘못인지 우리는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할리 베일리의 애리얼이 기억 속 첫 번째 인어공주인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백인만이 공주였던 이전 시대 영화에 의문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토이 스토리>를 본 우리가 과거 서부극 속 카우보이의 모습에 의문을 품는 것처럼.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어공주>는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디즈니는 그들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영화를 더 잘 만들 책임이 분명히 있다.


<인어공주> 속 애리얼의 선택은 디즈니의 선택만큼 과감하고, 그 이후의 행동은 딱 지금의 디즈니만큼만 용기가 있다. 디즈니는 표면적으로만 변화를 꾀하고 그 안에는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부계 사회로 편입하는 공주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의 형태는 부계사회로의 편입을 보여준다. 결혼 이후 자신의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여성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자녀들은 대체로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인어공주>에서 공주와 왕자가 사랑을 하기 위해서 변해야 하는 쪽은 공주였다. 왕자가 인어가 되는 선택지는 없었을까. 혹은 공주는 인어인 상태로, 왕자는 사람인 상태로 사랑을 할 수는 없었을까. 사랑의 맺음은 어째서 외적 동일화에서 궁극적으로 성사가 되어야 할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사랑의 시작점, 그리고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이 된 이유가 목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우연과 도움으로 치환되어 버린 주체성

인어공주는 왕자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주는 아니다. 이 말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인어공주가 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문어 마녀와의 갈등에서 애리얼의 승리를 위해 조력자의 도움과 희생에 의지한다. 최종적인 결투는 우연적인 상황에 기대어 허무하게 해결이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 왕자와의 마지막 만남이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왕의 허락 이후에 발생한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관객이 보고 싶은 마지막은 일어서기

모두의 배웅 속에 바다 위를 떠나는 쪽배를 탄 공주와 왕자의 모습이 <인어공주>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 모습에서 그들의 성장은 미미하게 느껴진다. 애리얼은 바다의 공주다. 바다 위를 표류하는 인어공주의 모습에는 어떠한 위험과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왕자와 공주가 미지의 육지에 도착해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 나가는 것 아닐까. 공주는 바다를 떠나고 왕자는 섬을 떠난다.  그 이후 그들의 삶을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 의도였을까. 영화의 마지막까지 디즈니는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아 보였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마녀와 거래한 애리얼에게도

결혼을 다짐한 왕자에게도

그리고 대중들의 기대와 다른 선택을 한 디즈니에게도.


디즈니의 영화를 보고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용기를 얻고 꿈을 키웠으면 한다. 디즈니의 작은 용기 때문에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오히려 용기를 얻게 되는 지금의 현상이 무섭다.


<인어공주>를 둘러싼 논란은 최근 문제가 된 '놀이공원 매직패스' 논란과 닮아있다. 핵심은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지금의 현상과 사회의 가치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가이다. 정재승 교수의 걱정도 지금의 우리가 아닌 다음 세대 아이들을 향해 있다. 누군가 더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의 <인어공주>를 다음 세대를 위해 보여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에도 책임이 따라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에게 카우보이는 학살자가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토이 스토리>를 보고 자란 우리가 <인어공주>를 보고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인어공주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희망 어린 궁금증을 조심히 남겨본다.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과정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의 디즈니가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디즈니의 선택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우리 다음 세대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프터썬> 인공지능 시대의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