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풍경이 시원하게 보이는 아침 커피 한 잔
커피나무 옆에서 커피를 마십니다. 추위를 피해 실내로 들어온 커피나무는 근근이 살아내고 있습니다. 벌써 1년 6개월째입니다. 처음에는 잎이 풍성한 멋진 커피나무였고, 화원에서 분갈이를 해서 들여온 것이라 물만 잘 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커피나무 이파리들이 끝부터 서서히 말라가니 과습인가 싶어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여 영양이 부족한가 생각되어 비료를 주었습니다. 용량을 상세히 읽고 권장하는 양보다 조금 덜 주었습니다. 그렇게 힘겨운 사투를 벌이면서 작고 하얀 꽃을 대여섯 송이 피워주었습니다. 커피꽃은 예쁘거나 화려하지 않고 소박합니다. 꽃이 피었으니 열매도 맺으려나 했는데 그만 모든 꽃들이 까맣게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파리들도 거의 다 떨어져 몇 개 남지 않은 상황이 되고 보니 이젠 죽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가지 끝에서 새끼손톱만 한 작은 잎이 돋아났습니다. 그렇게 여름내 다시 잎을 내고 열심히 성장을 하더니 이번 겨울을 다시 힘들게 건너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누구는 분갈이를 하라고 하고 누구는 화분이 작다고 하고 과습 때문일 거라고 하고, 죽어가는 화분도 사랑한다 말해주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말은 근거가 있는 말일까요? 정말 실험을 해보고 하는 말일까요? 지난번 화원에 갔을 때 하마터면 작은 커피나무 하나를 들여올 뻔했습니다. 지금 있는 화분을 치우게 될까 봐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한 잎도 태어나지 않고 앙상한 가지가 완전히 말라버릴때 까지는 그래도 잘 보살펴 보려고 합니다.
아기처럼 말을 못 하니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일 텐데 식물의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귀가 아직 열리지 않아 많이 답답합니다. 커피나무 잘 잘살아나겠지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사는 삶이 가능한 것일까요? 오늘의 할 일은 누가 정해놓은 것이고 내일로 미루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외출 후엔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는 날이 늘어납니다. 피곤하다는 이유이긴 하지만 딱히 몸이 피곤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저 누워있다 보면 오후의 시간이 모두 가버리고 하루의 플랜은 절반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에선 게을렀음을 인정하지만 딱히 벌을 주지는 않습니다. 혼자 일하는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들의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히는 것은 그들이 게으르고 싶은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꾸준히 써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기에 이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동기부여는 무엇일까요? 좋은 소설을 써서 책으로 만들겠다는? 시집을 내겠다는? 그러니 출판사의 원고 마감일이 작품을 쓰게 만든다는 것은 맞는 말인 것도 같습니다. 아직 원고 독촉을 받지도 못하는 슬픈 습작 가는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을까요? 날마다 한 편씩 무조건 쓰고 시가 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페이지를 채워나가자고 작심을 하는데 이 작심은 단 하루도 지켜지지를 않습니다. 유난히 시 쓰기에만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뭘까요? 시는 어렵다. 시에는 한방이 있어야 한다. 시에는 진한 감성이 멋지게 녹아 있어야 한다. 뭐 이런 생각들로 내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까요? 자궁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출산일을 지나고 있는 아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만큼의 세월, 이 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아직 시를 습작조차 하지 못한다면 시에 대한 어떤 지독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합평할 때 받았던 어떤 느낌 때문일까요? 잘 쓴 부분이 아닌 잘 안된 부분만 신랄하게 지적했던. 어쩜 그것도 문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관행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