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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시 Aug 23. 2024

모닝페이지

16. 초보은퇴자의 비애

오후의 포근한 햇볕과 따뜻한 커피 한 잔입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내게는 이 시간에 마시는 커피가 제일 맛이 좋다는 것을요.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나의 몸을 깨우고, 영혼을 깨우고, 생각도 깨워주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만 빠져나온 그곳은 여전히 잘 있습디다. 조금 서운하고, 얄미울 정도로 그곳엔 나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새로운 것들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떠나온 자리를 아쉬워할 마음조차 가질 수 없도록 말이지요. 그렇게 지워지다가 세월이 많이 흐르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인류가 지나온 이치이고 역사인 것을 아쉬워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냥 조금 씁쓸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지나온 영광의 자리는 다시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인도 손님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이 되는 순간 서로가 다 어색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 나는 그렇치는 않지만 오늘 만난 분 중 한 분이 떠나고 오늘 만난 새로운 얼굴 뒤로 또 다음 새로운 얼굴을 만나게 된다면. 그러니 직장생활 40년의 흔적은 떠나는 순간 없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엔 나 자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자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여도 상관없는 그 직책을 가진 사람만 존재하는 곳이 직장입니다. 어리석게도 그런 직장 그 자리를 굳건히 잘 지키겠다고 몸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출근부터 퇴근까지 하루 10시간씩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었던 어떤 직장인은 참으로 미련하였던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지 않으냐고 위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초보 은퇴자라서 그곳에 가면 나의 자리였던 그곳 나의 직원이었던 그들이 낯설지 않아서 더 서글픈 마음을 모르니 하는 말일 겁니다. 나 없이 중요했던 일들을 처리하고, 계획하는 일 그게 가능하더란 겁니다. 서글펐습니다.


봄이 온다는 것은 따뜻해진다는 것입니다. 베란다 바깥 창문을 열어도 식물들이 얼을까 봐 걱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겨우내 정체되었던 물건들과 그 위에 쌓인 먼지들을 하나 둘 밖으로 끄집어내어 아지랑이 속으로 던져 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누워있는 등을 떼내어 얼음이 녹고 있는 개울가 옆길을 시적시적 걷고 싶어지는 일입니다. 이번 봄이 특히 기다려지는 것은 지난봄을 몸과 마음 모두 힘들게 벅차게 여유 없이 보내버린 다음의 봄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꽃을 보러 멀리 떠나보는 계획을 세우고 여의치 않으면 혼자라도 떠나보리라는 객기도 가지게 되는 꿈을 꿀 수 있는 계절이 오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은 집도 이 봄에는 고쳐야 할 것 같고, 저쪽에 있는 집도 예쁘게 리모델링하여야 할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도 벅찬 움직이는 봄이 될 것 같습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기별을 받고 보니 마음부터 분주해집니다. 비울곳이 너무 많아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루의 많은 부분들의 비워내기에 투자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도는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더부살이로 살고 있습니다. 제 자리를 잡지 못한 물건들이 자꾸 발길질을 합니다. 너 때문에 좁다고 자리를 비켜 달라고. 누가 주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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