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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시 Aug 22. 2024

모닝페이지

15. 인생의 안개

아직 커피가 남았습니다.


모닝페이지는 아무도 없는 공간. 조용한 공간이 쓰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어서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창밖 세상과 대치하면서 준비한 커피를 홀짝홀짝 아껴가며 마셨습니다. 다행히도 아직 커피가 조금 남았습니다. 하늘은 선명하지 않습니다. 비라도 내릴 것처럼, 눈이라도 올 것처럼 흐리멍덩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며칠 오지게 추웠고 눈도 종일 내렸던 날도 있으니 오늘쯤은 오전 한때 소나기 같은 굵은 빗줄기가 좀 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은 먼지에 뒤범벅된 승용차를 지상에 두었거든요. 일부러 세차를 하러 가기는 아깝고 그냥 두자니 뭔가 찜찜한 그런 지경이 되어있네요. 강추위를 핑계로 오랫동안 세차를 안 했더니 꾀죄죄하기가 말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동쪽 산봉우리가 아주 조금씩 붉게 변해가는 것을 보니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계는 더 오리무중으로 변해 갑니다. 산골짜기는 이미 경계가 사라졌고 이제 일곱 개의 작은 봉우리들 마저 하늘과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이 세계는 어쩜 이리도 모든 것들이 닮아 있을까요? 우리네 인생과 말입니다. 


어떤 날 어떤 사건의 한가운데 있을 때, 정말 어렵고 망막할 때, 구룡령 정상위에서 맞닥뜨렸던 지독한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두렵고, 도망치고 싶고, 누군가 길잡이가 있었으면 싶고, 그런 상황들이 닮아 있습니다.

지금껏 두려움을 느꼈던 안개를 몇 번 만났을까요? 조금 전 말했던 구룡령 안개는 아이들 어렸을 때 여름휴가차 양양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밀려드는 차들을 피해 구룡령을 넘을 때 겪었던 일입니다. 정상에 섰을 때 1미터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안개에 휩싸여 산마루길을 내려오는 내내 긴장긴장 했던 기억입니다. 어린 딸도 덩달아 숨죽이고 있었답니다. 스무 살 초입, 친구들과 한라산 등반을 했습니다. 맑고 쾌청했던 등반길이었는데 정상-백록담을 내려다볼 수 있는-에 다다랐을 때 조금씩 안개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일행을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심했습니다. 안개의 심함보다 애써 오른 산인데 백록담을 볼 수 없는 아쉬움에 친구와 둘이 바위밑에 앉아서 안개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원래 산 정상의 안개는 바람이 한 번 불면 금방 맑은 시야를 보여주기도 한다는 것을 대청봉 정상에서 경험했었거든요. 한참 동안이나 안개가 걷히길 기다렸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안개의 농도에 그만 백록담 보는 것을 포기하고 하산했습니다. 그 후 삼십 년도 더 지난 다음 비 오는 날 한라산에 오르면서 또 안개와 맞닥뜨렸는데 그때는 사라오름에서였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백양사 애기단풍을 구경하고 올라오던 새벽녘이었습니다.  음성이었나 천안쯤이었나 고속도로 위에서 만났던 안개도 공포였습니다. 앞서가는 차가 비상깜빡이를 켠 모습도 잘 보이지 ㅇ낳으니 고속도로 위에서 더듬거리며 오느라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나의 손에 땀이 났던 기억입니다. 가을이 되면 우리 동네는 안개가 심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창밖에 회색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것 같은 날이 많이 있습니다. 안개가 물 위에서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아스팔트 위에서도 올라온다는 것을 본 것은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 지나온 삶에는 안개만큼이나 힘들고 공포스러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에 앉아 뒤돌아보니 안갯속을 잘 헤치고 집으로 돌아왔듯이 인생의 안개속도 잘 헤치며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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