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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장공장장 Sep 18. 2023

뮤지컬 사칠7

관객의 힘

1.  두 도둑의 이야기들

대학교 졸업반 무렵, 신작희곡 페스티벌에 당선이 됐다. 비슷한 시기 대학로에서 각색 및 연출 제안도 받았다. 두 명의 도둑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작품의 구조는 대략 이런 식이다. 사회 비판적인 사건들, 두 배우의 역량과 끊임없는 애드리브, 그리고 관객들을 '찐'으로 웃겨야 하는 코미디적 요소. 바깥에 있을 땐 전혀 몰랐다. 작품 안쪽 세계에 들어와 보니 그제야 실감이 되더라. 코미디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장르인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도둑이야기를 각색. 연출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분은 P선배님이다. 그분은 본 작품의 살아있는 역사이며, 코미디 연기의 대가이시다. P선배님은 나에게 코미디 템포나 타이밍에 대해서 종종 일러주시곤 했다. 배우가 2인이었을 때 어떻게 관객을 웃겨야 하는지, 3인이었을 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이 작품에서 다양한 배우들을 만났다. 몇몇 분들은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졌고 연말 유키 선생님 낭독회에 함께 하게 되었다.


뭐, 여하튼,


예상? 과는 달리, 이런 스타일의 대본은 굉장히 촘촘하다. 그리고 배우들과 협의를 통해 '촘촘한 부분'을 일부 쳐내 '일부러' 느슨하게 만든다. 빡빡하면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여백'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비어있는 자리에는 '약속된 애드리브'가 들어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약속된 애드리브'를 대사화하여 쪽 대본으로 배포할 때도 있다. 물론, 배우가 공연 중에 '진짜' 애드리브를 하는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그러니까 약속과 즉흥이 섞여 있는 셈이다. 하긴... 사실, 뭐가 됐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찐'으로 웃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웃음의 사칠

다시 사칠 이야기. 극의 전반부는 웃음으로 채우자고 합의를 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한다. 전반전은 코미디를 하기로 했으니, 관객들을 '찐'으로 웃겨야 한다. 그 시작은 의무소방원 씬이 될 것이다. 내가 의견을 꺼낸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웃기지 않을까요? 연출님도 화답한다. 저렇게 그렇게도 해보시죠.


앞서 말했듯, 대본은 최대한 촘촘하게 쓴다. 쓰면서 '여백'을 고려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혹은 채워두되, 여백으로 변할 소지가 있는 부분도 체크해 둔다. 웃음은 릴랙스 한 분위기에서 나온다. 정교하게 계산을 했지만, 씬 자체는 엉성한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 마치 찰리채플린의 그것처럼.


대본도 대본이지만, 이러한 씬은 배우의 역량이 정말 중요하다. 한 마디로 '놀 줄 알아야 한다'  대본이 좋고 연출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배우가 놀 줄 모르면 코미디 씬들은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공연계에 유명한 격언이 하나 있다. 야구는 '투수놀음'이고 공연은 '배우놀음'이다, 라는.


삼진! 삼진! 뛰어난 투수가 야구의 승부를 결정짓듯이, 공연도 마찬가지이다. 역량 있는 배우가 극의 승패를 좌지우지한다. 오죽하면 영화는 감독예술, 드라마는 작가예술, 공연은 배우예술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칠 캐스팅은 완벽하다. 사칠의 배우들은, 한마디로 모두가 무대에서 놀 줄 안다. 각자 스타일도 분명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관객에게 '찐'웃음을 선사할 만한 역량이 있다.


캐릭터가 확실한 정원이들


의무소방원 씬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연습기간 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연출님도 한 말이지만, 잘한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정말' 잘한다. 페어마다 각자 스타일과 그에 따른 웃음이 존재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배우들 간에 긍정적인 영향이 오고 간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소년 이준의 출동 퍼포먼스가 그랬다. 어쩌나 신나게 하던지. 나중에는 모든 이준이들이 저마다의 퍼포먼스를 만들었다. 정원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의무소방원 씬, 이준이를 '엎드려 뻗쳐'를 시킨다. (여기까진 정해진 대사) 그리고 그 아래 공간으로 들어가 이준이의 얼굴을 보며 군기를 잡는다.  이준이를 만지면 관등성명을 한다. 이것도 즉흥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방 강이준!! 이방 강이준!!


극장에 와서 애드리브가 결정되는 일도 있다. 가령, A타입 워리어 정원님은 의자를 자주 활용한다. 의자에 배를 대고 슈퍼맨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리고 극 초반에 김이준 씨? 김이준 씨?라고 말한다. 츤츤 정원님은 '말년상방' 넘버를 부를 때 춤을 춘다. 엉덩이를 씰룩씰룩 거리며. 무림 정원님은 '이 시간 지나고 나면'을 부를 때 자신만의 안무?를 귀엽게 선보인다. 세 페어 모두 재미있다. 흐뭇하게 지켜본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없던 애드리브가 공연 중에 즉흥적으로 생겨나기도 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배우들은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커가는 존재들이다. 관객들이 재미있어하면 배우는 더욱 신이 난다. 더욱 오버? 하게 된다. 그러다 분위기가 최고조에 다다르면 배우들 간의 '웃참 챌린지'가 시작된다. 약속된 대사가 아닌 애드리브를 마구 치기 시작하니까. 돌발 상황이다. 대체로 웃음을 참아야 하는 쪽은 김이준 씨들이다. 포지션상 웃음 공격은 정원이들이 주로 하니까. 나와 연출님 또한 그 '돌발상황'을 즐긴다.


재미난 사실. 막 애드리브를 치다가도 큐 대사는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다.

 





3. 정원이의 리스트


안정원

있어보자... 자동제세동기는 이쪽이고... 초순간 진화기... 분리형 들것이 여기... 부목은 저쪽이고...


그러니까, 안정원은 무슨 장비들을 체크하고 확인하는 것일까?




자동제세동기 출처/테크월드


자동제세동기는 강한 전류를 심장에 보내 다시 정상적으로 뛸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비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본 장비를 작동시키고 강한 전류를 보내면 요구조자가 그 충격?으로 몸을 크게 들썩거리는데 실제로는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본 장비를 작동할 때는 주변 사람들을 적정 거리에서 물러나게 해야만 한다.


초순간진화기 출처/삼주이엔씨

말 그대로 '초순간'에 진화하는 장비이다. 물의 압력으로 인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을 잡는다.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없다. 중앙소방학교에서 조교 시범으로만 본 적이 있는 장비. 초순간진화기를 착용하고 있으면 굉장히 멋있다. 혹자는 이 장비를 착용해야만 영웅의 극의에 다다를 수 있다고;;;;


분리형 들 것은 예전에 설명했으니까 패스.


그다음은 부목.



부목 출처/더미통상

부목은 종류가 다양하다. 골절 환자를 대상으로 쓰는 구급용품이다. 진공 형태의 부목도 있다. 골절 부위에 부목을 대고 공기를 빼는 방식이다. 부목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쓴다. 나 같은 경우는 (2000년대 초반 기준) 위쪽 부목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진공형 부목 출처/명문의료기


거의 모든 장비와 구급용품들은 창고에 적재되어 있다. 이것은 소방관들과 요구조자들의 안전과 직결되는 것들이다. 때문에 장비를 체크해 두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정원이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임) 출동부서에서 장비나 물품의 이상이 있으면 그 즉시 소방행정과 장비계에서 확인을 하고 교체를 해준다.





4. 공연의 변수

공연은 변수가 많다. 모월 모일 공연 당일, 츤츤님의 안색이 너무 안 좋았다. 장염 같다고도 했다. 119 구급대 경험으로 비추어보건대 탈수현상도 있었다. 창작진 쪽에서 '전장의 워리어님'한테 연락해서 교체를 할까, 이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츤츤님도 밤새 너무 아파서 잠깐 그런 고민을 했다고 한다. 워리어한테 부탁을 해볼까, 라는. 하지만 아닌 것 같아서 그만뒀다고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을 보러 온 관객들이 있을 테니까, 참고 공연을 하겠다고 한다.


...하핫, 작가님, 근데 또 제가 결국 이걸 해냅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츤츤님이 말한다. 나는 고민한다. 이게 맞나? 배우가 한사코 하겠다고는 하지만, 이게 맞을까?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츤츤님은 자기가 드라마에 잠깐 나왔다며 핸드폰을 내민다.  


아니, 지금 이걸 볼 때가 아니라...

제가 또 프로 아닙니까? 관객들 앞에서 이 안정원이의 모습을 보여줘야,...

츤츤님, 잠깐만. 일단 약은 드셨어요?

이겨내야죠. 우리 같은 배우들은 또 이런 것쯤은 거뜬히...


내 말이 안 들리나 봐...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연출님은 불안한 눈으로 무대를 바라본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정원이의 등장씬... 나오지 않는다. 무대 뒤쪽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시간이 경과했다. 불안함이 점점 커질 무렵, 안정원이 박스를 들고 나온다. 이미 지친 기색이다. 하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마치, 계속된 업무에 지친듯한 모습을 연기한다. 천상 배우구나. 기력이 없다면 풀 죽은 연기를 하면 된다. 아픔조차 연기로 치환할 수 있는 그는 진짜 배우다.


상황실, 무전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 바람, 사육?

사칠!


강이준이 나온다. 모찌 이준이다. 그 또한 모든 사정을 알고 있다. 강이준을 연기하고 있지만 전혀 티 나지 않게 안정원을 살펴보고 있다. 상태가 괜찮은 건지, 혹시라도 애드리브가 들어오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찌님은 대사를 하는 내내 아주 기민하고 예민하게 안정원을 의식하고 있었다. 어리지만, 정말 훌륭한 배우다. 변수나 돌발 상황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출동을 나간다.

솜이 씬이 시작되었다.


15분. 나는 15분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관객들이 웃고 박수를 보내면, 정원이는 살아날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극이 끝날 때까지 아픔은 잊고, 정원이는 관객들의 기운을 받아 쭉쭉 갈 것이다. 배우는 그런 존재이니까. 자신을 보러 온 관객들이 있기에 아파도 나간다. 관객들이 좋은 기운을 보내주면 배우는 힘이 난다. 만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공연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우리들은 관객이 있기에 존재한다. 특히 배우들은 관객들의 사랑을 먹고 자라난다. 관객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 가치가 없다. 내 글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정원아, 15분 정도만 버티면 된다.


의무소방원 씬이 시작되었다. 이준이가 어리바리한 신병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기민하게 안정원을 보고 있다. 관객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모찌 이준이 계속 츤츤 정원이를 살피고 있었다는 것을.


엇? 잘 못 봤나? 정원이가 살짝 휘청한 느낌이 들었다. 걱정이 지나쳐서 내가 잘 못 본 건가? 정원이의 얼굴을 본다. 탈수현상이 온 것 같다. 확실히 지쳐 보인다. 가장 좋은 응급처치는 물을 마시게 하고 바닥에 눕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씬이 한창이다. 내가 저기에 '여백'을 넣어뒀던가? 물을 마시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야, 물 가져와.


약속에 없는 대사다. 정원이가 마치, 후임에게 명령하듯, 대사를 친다. 그래, 처음으로 후임이 생겼으니까, 선임놀이를 하고 싶은 정원이의 심정을 담은 것처럼, 좋은 연기다. 그런 모습을 연기한다. 준비 없이 훅하고 들어온 대사이지만, 모찌 이준이는 당황하지 않는다. 이미 등장 때부터 그를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옙!


얼른 정원이에게 물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한 모금 마신다. 후우,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후로 몇 차례 비슷한 방식으로 물을 마셨던 것 같다. 이준이는 당황하지 않고 '뚜껑 드릴까요?' 뭐 이런 식으로 애드리브를 쳤던 거 같은데...ㅎㅎ 모찌 이준, 그거  참 영리하게 연기를 잘하네. 뭐 여하튼, 다음 씬이 시작되었다.  


가연성 가스는 공기보다 가벼워서,

이렇게 엎드려...


정원이가 바닥에 엎드린다. 아주 잠깐이지만, 정말 편안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탈수 현상 다음에 수분을 섭취하고 누워있는 게 응급 처치 정석이니까. 건강하고 쌩쌩한 사람이 누우면 큰 차이를 못 느낀다. 하지만 지금의 정원이는 경우가 다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정원이가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도록, 좀 더 엎드려 있기를 바랐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딱히 방법은 없겠지만 말이다. 근데,


어라?


이준이가 정원이처럼 바닥에 엎드린다. 오호, 그래, 시간을 좀 더 끌어줘. 객석에서 웃음이 나온다. 이준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듯싶더니, 이내 발아래 있는 방화복을 끌어와 자신의 머리맡에 둔다. 그리고 방화복을 배게처럼 베는 연기를 한다. 관객들이 더 크게 웃는다. 예쓰!!! 평소 때보다 더 오래 엎드려 있었다. 센스가 좋다. 기민하게 정원이를 관찰한 결과이다. 한편으로는 가슴 뭉클하다. 이것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만 아는 신호다. 서로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다. 마침내 정원이가 일어난다.


관객들의 웃음과 따뜻한 에너지 속에서,

그리고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동생의 마음을 느끼며,


나는 정원이의 얼굴을 본다.


표정이 약간 거만해졌다!!!


살아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치, 지금의 츤츤님은 마음속으로 이런 대사를 치고 있는 것 같다.


이 내가 안정원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제 이 극은 쭉쭉 진행될 것이다.




4. 영웅담

하여, 이 이야기는 츤츤 정원이의 영웅담이 되었으니,...


움하하하하!!!


분장실, 정원이들과 이준이들이 모여 있다. 위층에서 무림정원님도 내려왔다. 츤츤 정원님이 자신의 영웅담을 이야기한다. 빌런의 웃음소리를 내며... 연출님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휴, 다행이다. 별 탈 없이 잘 넘어갔구나. 츤츤님은 의기양양하다. 기획님한테, 자신이 이 경험을 통해 배우로서 한 뼘은 더 성장했다는 말을 한다. 자기가 결국 이겨냈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그렇게 말했다. 만화 주인공처럼. 그리고 자기가 무대 위에서 '내장출혈로 쓰러진 한 남자'가 될 뻔했다는 말도 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때, 나는 한쪽에서 씨익, 미소를 짓고 있는 모찌님을 바라보았다.


모찌님, 마지막 장면 오늘따라 너무 슬펐어요. 저 울었잖아요.

와아, 진짜요? 더 잘해야겠다.


모찌님이 활짝, 웃는다. 마음 씀씀이도 고맙고, 무대 경험이 선배들에 비해 많지 않음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아서 더욱 고맙다. 공연이란 이런 것이다. 지나고 나면 더욱 좋아지는 그 무엇. 그리고 배우들마다 그 안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기쁨. 자신들의 연기에 관객이 웃고 울으면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다.


예에~ 공무원증이 나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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