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칠은 원작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리부트 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다. 이쪽 세계의 안정원과 저 쪽 세계의 안정원이 있는데 전혀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예를 들자면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지구 616에도 있고 지구199999에도 있다. 2021년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을 보면 여러 세계관의 스파이더맨이 동시에 한 세계관에서 나온다. 개인적으로 세대가 세대인지라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을 좋아한다. 가장 늙고 오래된 스파이더맨? 여하튼, 사칠이 그런 식이다. 인물은 같지만 기본적인 서사가 다르다.
다양한 세계관의 스파이더맨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출처/네이버 영화
흥미로운 점은, 각 지구별로 스파이더맨은 다른 인생들을 살았지만, 그들의 겪었던 주요 사건은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웬 스테이시의 죽음(이때, 아 제발 죽지 마!!! 엄청 울었다!!! ㅠㅠ), 피터파커 삼촌의 죽음 등등. 사칠도 마찬가지.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지만 주요 사건 몇 가지는 같다. (무슨 사건들인지는 스포가 될 수 있으니까 나중에 또 언급하기) 확실한 건 원작보다 이 쪽이 더 비참하고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독하리 만치 현실적이다. (사실, 이제는 원작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작품이 있는 느낌이라서)
2. 현실적인 이야기
처음 기획 단계. 기획님과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했다. 원작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단점은? 매력은 '힐링'이다. 약간의 판타지와 브로맨스가 돋보인다. 단점은 소방관이라는 직업군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원작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이해'에 관한 극이니까. 각 인물의 목적성도 있었고 상황이나 성격도 변화했다.
만일, 이 작품의 직업군이 돋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실적으로 쓰면 됩니다.
그럼 우리, 진짜 소방관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기획님의 제안에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원작은 십 여개의 큐빅으로 구성이 되었다. 큐빅을 쌓아가며 사건현장을 만들었고, 다양한 모양을 통해 상황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연극적으로 만드는 스타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실제 사고 현장의 무대를 구연할 자신이 없기도 했다. 내 트라우마도 함께 있는 극이다. 내가 과연 실제 현장을 바라볼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제가 '힐링'이었던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걱정 마. 다 잘 해결되었어, 라는.
즐거운 작업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매트릭스의 그것 같기도 했다. 내가 괜찮아지고 싶은 세계. 아픔도 상처도 모두 이겨낸 나만의 세계.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도 플롯도 조금 복잡했던 같다. 트라우마를 직면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이야기가 스트레이트로 가지 못하고 배배 꼬인 것 같은, 그런 느낌? 공연은 나름 성공적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다시, 사칠.
진짜 현실적으로 이야기해 보자고?
그렇다면 우선 내가 아닌 다른 연출님이 필요하다. 사건사고를 제대로 구현해 줄 수 있는, 연출님. 아마 나는 못할 것이다. 또 큐빅을 이용하거나 상징적인 그 무엇으로 채우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핑계 같지만, 사실적인 무대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웃음) 새로 온 연출님은 장비계 창고를 기획?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도 참여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스텝회의나 무대, 조명 등등에 관여하지 않으니까. 나를 많이 배려해 주셨다. 연출님과 스텝분들 모두. 뭐, 여하튼,
연출님의 아이디어는 정말 다양했다. 그 좁은 무대를 전부 활용한다!!!
그리고 옆에서 내가 열심히 고증?해주었다.
차량사고 때 이렇게 들어가서요. 요렇게, 하고.... 유압스프레더는 또 요렇게...
와, 연출님. 이거 셔터가 진짜 같아요.
무대디자이너님이 진짜 소방차 셔터를 가지고 오셨어요;;;;
배우들도 열심이었다.
가령 구급통이 있었는데, 침묵의 인자강 이준님이 구급통에 '경기도'라고 적혀 있다고ㅋㅋㅋ
여긴 원척시인데, 원척시는 경기도 아니지 않나요? 라고 해서 내가 또 맞다고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로 교체.
포그가 아래부터 나오길래, 위에서부터 나와야 한다고 적극 주장함ㅋㅋㅋㅋ
거듭, 거듭, 감사하게도 스텝분들이 다 들어주셨다.
모두가 진짜 소방관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했으니까.
원작이 3단 암전 후에 수색 요령을 잠시 보여줬다면, 사칠에서는 3단 암전 후에 진짜 사고 현장을 보여준다.
근데 '보여준다'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미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안 보이니까;;;;
배우들한테 행동요령을 열심히 가르쳐줬는데... 깜깜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배우들이 암전 중에 크게 말하는 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손을 길게 뻗는 거야!!! (이게 솔직히 크게 말할 대사가 아닌데;;;;)
배운 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안 보이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칠 포토카드가 나왔당!!!
3. 대답
작품을 리부트, 그리고 새로 집필하는 동안 기획님이 큰 용기를 주셨다. 이미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사칠은 누구나 예상가능한 스토리다. 포스터만 봐도 대략 짐작이 되는 이야기. 이제 판타지는 없다. 사실적이고 흔하디 흔한 이야기이다. 그게 우리네 '현실'이니까. 이 뻔한 현실이 우리 주변에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까.
사칠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감'의 이야기이다.
소방관의 직업군을 전면에 내세운다.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인물의 성격도 변화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현실이다. 그리고 절대 변하지 않을 비극이다. 지독하리 만치 진짜의 이야기를 쓴다. 살아남은 자와 떠난 자의 이야기. 마치 안정원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그리고 뒤죽박죽인 이야기를 쓴다.
저어, 근데 시간대를 너무 꼬아놓으면 관객들이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작가님의 시간대는 단 2회 차만에 간파되어 SNS에 박제되어 있을 거예요.
기획님의 말에 연출님도 대꾸한다.
수천 번 리트윗 될 걸요, 아마? 의무소방원 시간대도 올라올 거 같은데?
으음... 그렇구나. 난 '박제'되는구나....
포토카드가 정말 예쁘게 나왔슴다!!
사칠은 관객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데스크에는 여자 소방관들이 있다. 그분들이 관객들을 원척소방서로 안내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원이의 생각 속으로 들어온다. 정원이의 일기장을 본다. '구급일지'로 상징화된 이미 써진 일기장... 그 속의 사건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정상이 아니기에 뒤죽박죽이다. 우리는 정원이의 시선을 통해 그 안의 세상을 본다. 이준이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담담히, 때로는 재밌게, 혹은 아프고 슬프게...
이미 정해져 있다... 두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와 숙명은...
변하지 않는구나. 그래, 현실이지. 현실은 그래. 비극적인데 전혀 변하지 않아. '이렇게 된 일'을 무대에서 목격한다. 웃고 울고, 그러는 사이, 이제 극은 끝난 듯하다. 관객들이 나온다. 하지만 사칠은 끝나지 않았다. 연출님과 나, 그리고 기획님이 생각한 사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관객들은 사칠이 유일하게 변화한 순간을 목격한다. 캐스트 보드가 바뀐 것이다.
... 정복을 입고 있는, 그 두 사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혹은 계단을 통해 관객들이 내려간다. 캐스트 보드에 관해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뒤를 본다. 포스터를 본다. 이 극에서 결여되어 있던 것. 빠져 있다고 생각했던 그 무엇. 그리고 가장 듣고 싶었던 그 말. 입장부터 퇴장까지 수많은 회의를 통해 만들어진 그 대답.
작품의 주제, 줄거리, 시놉시스 모든 것이 담긴 포스터
끝내 정원이와 이준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극을 본 당신은, 살면서 어느 순간, 어느 시간대에...
그리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외면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날이 왔으면 한다.
사칠, 이라고.
4. 정원아, 멀리 떠나 봐
에필로그. 정원이와 이준이가 전국을 돌며 출동을 나간다. 어디든 가면 좋겠다. 정원이라면 소방청 홈페이지나 소방방재신문을 보며 사건을 찾아낼 것만 같았다. 그날은 커튼콜데이 첫날이었다. 울산에서 황산이 일부 누출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사건을 정원이와 이준이에게 알려주었다.
정원이가 원척시가 아닌, 다른 곳, 다른 바다를 보았으면 좋겠어.
이미 울산으로 가봤자, 사건은 다 해결됐을 거야.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대.
울산 앞바다, 백사장에 앉아 캔맨주라도 마시렴.
허탕 쳤다고 괜히 자책하지 말고.
이제 사건사고가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 봐, 정원아.
무림정원
어디야? (사건 개요 좀 읊어봐라)
모찌이준
울산...
어, 대답해. 이준아. 멀리 가는 거야. 사건사고가 없는 곳으로 자유롭게 멀리...
황산이 일부 누출되었다고 말하면...
모찌이준
울산... 오염수 방출?
으어어어어어어어어!!!!!!!!!!!!!!!!!!!!!!!!!
오염수!!!!!!!!!!!!!!!!!!!!!!!!!!!!!!!!
무림정원!!!
받아주지 마!!!
연기의 고수 정원님!!!
제발, 오염수가 아니라 황산 아니야? 라고 애드리브 쳐주세욧!!!!
무림정원
오염수를 방출했어? 이거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네.
으아아아!!! 받아줬다.
당연히 여유 부릴 때가 아니지. 오염수라면... ㅠㅠ
그래서 정원과 이준이는 해맑게 웃으며 울산? 의 오염수 방출 현장으로 출동을 나감;;;;;
참고로 모찌 이준이는 그날 영상을 보면 대략 30초 구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
울산은 오염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요...ㅠㅠ
혹시라도 오해 마시길.
5. 답장
회사를 통해서 한 통의 수기 편지를 받았습니다. 허걱! 행운의 편지 같은 거 아닐까?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긴장된 마음으로 편지를 봤습니다. 다행히 행운의 편지는 아니었네요^^;;; 안은서 양, 고등학교 1학년이시네요. 극작가가 꿈이라고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전 고교시절에 직접 공연을 보러 다닐 생각을 전혀 못했거든요. 꿈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멋진 거 같아요. 분명, 좋은 극작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필드에서 만날 날을 기대합니다.
일단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보통 글을 쓸 때 해당 인물이 되려고 노력을 해요. 사칠 같은 경우는 유달리 제 이야기가 많아서요. 몰입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던 거 같아요. 상방 때까지 후임이 안 온 것도 다 제 경험담입니다. 그리고 잡생각이 많아지거나 아무 생각이 안 들 때는 게임을 해요. 유일하게 하는 게임이 '마비노기'입니다. 전 스타크래프트도 할 줄 몰라요.ㅠㅠ 이 밖에도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기도 해요. 독자의 입장에서 읽기보다는, 바둑의 복기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이 작가는 이 상황에서 이런 플롯을 쓰는구나. 이런 설정을 복선으로 쓰는구나 등등.
저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말 많은 책을 읽었어요. 지금은 잘 안 읽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에 비하면 지금도 많이 읽는 편입니다. 대학원 관련 독서도 있고 여러 가지 원고들 때문에요. 특히나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는 그 시대, 그 세대의 이야기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 조사를 많이 해요. 요새는 광주 아시아문화 전당에서 유키 선생님이라는 작품을 집필하고 있어요. 일제 강점기와 광주 학생운동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료'가 될 만한 것은 다 찾아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와 관련한 독서량이 많겠지요?
논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자료들
참 진부한 이야기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사칠을 또 볼 거라고 하셨는데, 고등학생이라 용돈을 모아서 보고 있겠지요? 회사를 통해서 연락 주세요. 제가 은서 양이 아직 관람하지 않은 페어로 한 장 보내드릴게요. ^^ 마지막으로 저희 공연 애정을 가지고 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건 은서 양뿐만 아니라 사칠을 보고 계신 모든 관객분들께도 드리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