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내전 - 김웅
사람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때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변호사로 빙의하는 것이다. 조직의 논리와 정서를 필연적인 일인 것처럼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도록, 그 외에는 생각할 수도 없게 편을 들어준다. 보통 자신의 말에 자신이 취해 조직과 하나가 되곤 한다. 다른 방법은 검사로 빙의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조직의 논리에 경악을 금치 못하도록, 다른 방식은 없었을지 고민하게끔 말이다. 이때 당연하던 조직의 논리는 이상한 것이 된다. 이상한나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사회적 현상으로 드러난다.
<검사내전>에서 김웅 검사가 택한 방법은 명백히 후자다. 오랜 시간 검찰에 몸담았기도 했고, 부족한 자신조차 검사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 검찰조직에 애착을 느낀다고도 말하지만, 그는 검찰조직을 대할 때 변호인석에 서 있기보단 검사석에 서 있다. 배심원단을 <검사내전>의 독자들에게 맡기고 기다리고 있다. 검찰에게 과연 어떤 판결이 내려질 것인가는 당신의 몫이다.
어떤 조직이건 사람들이 운영하는지라 인간적인 면모가 있겠지만, 그 일면이 보편적이리란 보장은 없다. 현재의 조직논리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통용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찰도 그렇다. 김웅 검사는 검찰과 관련된 얘기를 할 때면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서 최악의 모습을 상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목숨 걸고’ 속이려는 범죄자들을 상대하는 나날을 보내와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찮은 자존심 싸움에 업무로 바쁜 검사들을 소환하는 차장검사에게 “차장은 잘 몰랐겠지만 검사는 개가 아니다.”라고 성토한다. 동시에, “내 아이가 커가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답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나를 매일 밤마다 목격한다.”며 자조한다.
그렇지만 검사들은 시험을 아주 잘 본 사람들일뿐 사는 일에 번민하는 것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도 말한다. 얘기를 듣다보면 검사도 사람인지라 일찍 퇴근하고 싶어 하는구나, 그들도 몸은 하나기에 업무가 밀리는구나, 그들도 윗선의 당근과 채찍 때문에 고민하는구나를 공감할 수 있다. 즉 <검사내전>은 검찰조직이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일반대중의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독자는 검사들이 보여주는 인간군상을 우리내의 모습을 보는 때와 똑같은 자세로 바라보게 된다. 덕분에 독자는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때처럼 검찰 조직의 문제도 고민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검찰의 다른 모습도 상상하게 된다. 행동의 이유가 보이니 변화의 가능성도 점칠 수 있는 것이다.
김웅에겐 성역이 없다. 독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며, “그 결과 아무리 허술한 속임수라도 피해자의 욕심과 만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일반인들은 이 같은 진실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기에 김웅의 직언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얘기라고 착각하지 말라. 우리가 검사가 아닌 범죄자들로부터 노려지는 범죄의 대상인 이상, 우리는 범죄를 누군가 의도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운명적으로 일어난 억울한 사고처럼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김웅이 짚어주지 않았더라면, 실험용 생쥐가 과학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것처럼 우리는 범죄를 겪고서도 같은 범죄에 다시 노출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나 같은 서민들에겐 “승리고 패배고 다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다는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대사가 그대로 적용되는지라 더 소중한 말들이다.
저자가 말하는 범죄의 이론은 어떻게 보면 자본 논리와도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빚을 진 채무자는 이자에 허덕이지만, 정말 거대한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는 오히려 채권자를 좌지우지한다. 빚을 떼먹을까봐 채권자들은 채무자에게 추가 금액을 지원하기도 한다. 파산 선언을 막기 위해 채무자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전전긍긍해야 할 수도 있다. 관계는 빚의 크기에 따라 역전되며, 채무자는 빚으로 사업을 벌여 존경받기도 한다. 범죄의 경우에도 피해자들은 피해를 메우려다 오히려 더 큰 범죄에 말려든다. 그리곤 모든 것을 빼앗긴다. 피해자들이 미망과 절망의 사이에서 헤매는 동안 범죄자들은 한 몫 챙겨 빠져나간다.
현실이 이런 판국이니 “법이 궁극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도 알아채기 시작했다.”고 김웅은 말한다. 어쩌면 법이란 보호막이 어느새 굴레가 되어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웅은 특히 우리나라 고소 제도의 기형적 발달을 우려한다. 그는 “소송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이라곤 다시는 송사에 휘말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정도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장기화된 소송으로 가난에 허덕이게 된 화가 휘슬러의 사례를 들면서 소송법의 편의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폐단을 지적한다. 본디 소송과 같은 전쟁이 낳을 수 있는 것은 폐허뿐이지 않던가. 그 위대한 카르타고 제국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첫 번째 포에니 전쟁을 치룬 후의 제국은 강성했다. 두 번째 때도 나쁘지 않았다. 세 번째 전쟁 후에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정의는 희생자에 대한 연민과 가해자에 대한 연민 모두로부터 나온다. “별다른 소명의식이나 야망 없이” 시작한 김웅이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지점일 것이다. 그가 품은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분노’는 악행을 행한 자만이 아닌 그를 악인으로 만든 다른 모든 것에게도 향한다. 사안 자체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난립하는 견해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건해결에 필수인 덕목일 것이다. 그 스스로는 “성장하거나 진화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지만, 나도 고백컨대 책에서 보이는 김웅은 수십 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오직 사람만이 답임을 <검사내전>에서 느꼈기에 더욱 그렇다. 그가 지금의 분노와 연민을 잃지 않기를 기원한다. 진실은 시대의 아이이지, 권위의 아이가 아니기에 시간이 그를 지지해줄 것이라 믿는다.
서평 <이상민 / 리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