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을 배우다 - 마거릿 크룩생크
“노안이시네요.”말을 건넨 사람은 짓궂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노안이 일찍 오면 나중에는 동안이 된데요.”라고 짐짓 선심 쓰는 척을 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노안이라는 말에 기분 나빠한다. 그러고는 “전 동안인데요.”라고 반박한다. 이 짧은 대화는 ‘나이듦을’ 부정적인 것이라 단정 짓는 사고방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늙은 것은 기분 나쁜 상태이며, 젊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관념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마치 둘 모두 자신만은 영원히 늙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 듯하다.
진시황조차 실패한 불노불사가 아닌 이상, 사람은 모두 늙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늙는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확정된 미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고령화 사회’, ‘인구절벽’ 같은 무시무시한 용어들이 등장하며 노년의 삶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담론은 ‘늙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노동력을 비롯한 모든 가치를 상실한 용도폐기상태로서 정의한다. 나아가 세대론에 이르면 노년은 물리쳐야 할 적이 된다. 이런 주장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바처럼 정말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일까?
마거릿 크룩생크는 <나이듦을 배우다>에서 통념적으로 폄하받고 있는 ‘늙음’을 재조명한다. 노안과 동안으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노화를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생물학적 체내시계에 따라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노화는 사회적인 현상이다. 우리의 육체가 쇠약해지는 것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늙음을 둘러싼 고정관념이 억지로 요구하는 노년의 역할이 있다는 얘기다. 노인들은 은연중에 지혜의 전수자, 아니면 돌봄 서비스의 제공자가 되어줄 것을 강요받는다. 심하게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인 환자 역할이 당연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고정관념들은 터무니없는 편견에 기반한다. 우선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노인이 사고가 경직된 꼰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육체적인 쇠약에도 개인차는 무척이나 크다. 알츠하이머는 늙으면 걸리는 병이라고 착각되지만, 사실 알츠하이머에 걸리는 노인 비율은 지극히 적다.
발병원인조차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는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들만을 조합하여 실존하지 않는 노년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반복 재생산하고 있다. 반복되는 주입에 이제는 노인들 스스로도 세뇌됐다. 그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종종은 열려 있는 무한한 선택지를 저항 없이 포기해버린다. 결국 남아 있는 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지속적인 왜곡의 원흉을 몇몇 거대 권력의 편의주의라고 지적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의료업계의 노인 착취다. 그들은 노인을 엄청난 양의 진료와 약을 팔아치울 수 있는 판매처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에서 65세 이상은 전체 인구의 13%만을 차지하지만 전체 처방약의 34%를 소비하고 있다. 수익 논리에 밀려난 노인들은 약물 오남용의 희생양이 되어 약물 유해 반응에 고통받고 있다. 거기에 다른 원인으로 생긴 증상조차 노화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의 편견이 더해져, 적절한 조치보단 과잉처방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노인들은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표적이 되어 이중 삼중고를 겪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나이 하나로만 정의 내릴 수 없다. 노화를 결정짓는 실제 변수도 무궁무진하게 많다. 추적조사를 해보면 계층, 인종, 성적 지향, 법, 가족 구성, 직장, 은퇴와 같은 요소들로도 사람들의 생애주기가 크게 변함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리고 있는 노년의 모습이 다르다. 사회의 이익집단들이 설정해놓은 것처럼 바람직하고 성공적인 노년의 모습이 하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 ‘성공’이란 단어가 가미하는 신자유주의의 그림자는 늙는 것에까지 경쟁논리를 도입하게 한다. 동안이 되도록 분주하게 발버둥 쳐야 하는 것이다.
연령에 따라 사람의 우열을 구분하는 연령 차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저자는 비판적 노년학을 제안한다. 기존의 주류 노년학은 노화 과정을 관리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노인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기회가 없는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 노인은 자기의 영역에서 유배된 혹은 식민화된 존재에 그친다. 그래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간의 노년학에서 간과되어 왔던 노년의 중요한 요소들 즉, 우발성, 모순, 모호성에서 해석 틀을 마련하려고 함이 옳다는 게 비판적 노년학의 주장이다. 이 작업은 이상한 가치판단적 해석으로 인해 은폐되어 왔던 측면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은폐되어 왔던 요소 중 하나로 기존의 노년학에서 간과되어온 여성들을 꼽을 수 있다. 평균적으로 여성의 수명이 더 긴 편이다. 따라서 노인의 성비는 여성이 더 많다. 노인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면 노인문제가 여성문제로도 직결될 수 있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거기에 오랜 기간 사회에 고착화된 불평등 때문에 노인문제에서도 여성들은 더 취약하다. 미디어가 제시하는 미의 기준 같은 불필요한 자의적 기준들이 여성들에게는 추가적으로 지워진다. 노년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더 착취당하는 구성원이 외면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연령 차별주의는 화제성이 부족해 기금을 모으기 어렵다. 덕분에 여성학계에서조차 외면받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도 이익집단의 논리가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목적은 삶의 증진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노년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은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은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전 세대들이 해결하지 못하거나 만들어낸 지금의 문제점들을 자신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낡은 나사의 새로운 회전에 지나지 않는다. 새롭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을 주장하는 자신뿐이다. 그런 생각 자체가 역사적으로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낡은 유물이다. 새로움과 낡음, 젊음과 늙음, 무어라 부르건 되풀이되어온 이분법임은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나이 같은 요소로 구분 짓는 행위는 폭력에 불과하다.
카프카는 “초조해하는 것은 죄이다.”라고 말했다. 시급한 문제는 많고 마거릿 크룩생크의 이론이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론을 갑자기 낙하산식으로 적용하는 우를 범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편의주의를 비판한 저자부터가 그런 일은 원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렇지만 억압된 것은 어떤 식으로든 회귀하기 마련이다. 차별의 고름은 어떤 식으로든 터져 나온다. 명분이 연령이라고 해서 다를 까닭은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의 힘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서재에서 나온 개념이 도시를 송두리째 파괴해버렸듯이, 사상의 힘은 우리의 삶을 근본부터 바꿔놓는다. 진보냐 퇴보냐의 방향 설정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지금 그 분기 앞에 서 있고,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서평 <이상민/리플 정회원>